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70) 할매 국숫집, 아지매 국숫집

우현 띵호와 2021. 9. 25. 23:05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70) 할매 국숫집, 아지매 국숫집

최고 갑부인 윤 첨지
장사 잘되는 할매 국숫집 앞에

국수가게 열고 싼값에 파는데…

윤 첨지는 뿔이 났다.

추수가 끝나고 동짓달이 되면 재산이 쑥쑥 불어나야 하는데

근년에는 그 망할 할매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

보릿고개에 놓았던 장리쌀을 거두러 다니면

열에 아홉은 갚을 길이 없어 전답을 헐값에 넘기기 마련인데,

요새는 할매가 대신 갚아줘 전답 문서가 넘어오는 일이 없다.

아예 보릿고개 때부터 할매에게 돈을 빌리러 가는 사람도 많아졌다.
윤 첨지의 축재에 걸림돌이 되는 할매는 도대체 누구인가?

열두살 먹은 손자 하나 빼면 핏줄이라고는 다 끊어졌지만

합강 포구에서 국숫집을 키워 부자가 된 여장부다.

합강은 두 강이 만나는 곳이다.

동북강에서 내려온 적송 뗏목이 나루 옆에 산더미처럼 쌓이고,

약초며 산채며 피륙도 바리바리 황포돛배에 실려와 부려진다.

남강에서는 온갖 곡물이며 유기며 옷감을 배에 가득 싣고 온다.

그러니 합강 나루터는 장날이 따로 없다. 언제나 상인들로 손님들로 북적거린다.
나루터에서 올라오면 저잣거리에 온갖 가게가 이어진다.

국밥집, 너비아니구이집, 매운탕집 등등 즐비해도

할매 국숫집만큼 손님이 많은 집은 없다.

할매 국숫집 식단은 철따라 나오는 국수 한가지뿐이다.

봄이면 막국수, 하지가 되면 은어 삶은 물에다 면발을 얹은 건진국수,

삼복 때는 콩국수, 백로가 지나면 비빔국수, 상강이 되면 메밀국수….

장모가 신행온 맏사위 대접하듯 할매의 국수 맛은 정성이다.

언제 먹어도 감칠맛이 돈다.
할매는 후덕해서 급전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도 이자를 안 받고,

보릿고개에 땟거리가 없는 사람에게는 곡식을 보내주기도 한다.

윤 첨지에게는 할매가 눈엣가시 정도가 아니라 원수다.
윤 첨지가 집사를 불러다 대책을 궁리한다.
“왈패들을 시켜 할매 국숫집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릴까요?”
“그보다는…. 하루에 몇그릇씩이나 파는가?”
“소인이 며칠 지켜봤더니 적을 때가 삼백그릇, 많을 땐 오백그릇입니다.”
보름 후 할매 국숫집 맞은편, 항상 파리만 날리던 너비아니구이집이

문을 닫고 목수들의 망치소리가 요란하더니 ‘아지매 국숫집’이 문을 열었다.

국수 한그릇 값이 할매 국숫집 반값인 5전이었다.

할매는 혀를 차며 “어디까지 가나?” 했지만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합강 최고 갑부인 윤 첨지가 주인인 아지매 국숫집은

한달이 가고 두달이 가도 밀가루값도 안 되는 5전을 고수했다.

할매 국숫집은 손님 발길이 뚝 끊겨 밀가루 반죽이 쉬어빠지기 일쑤였다.

여섯달을 채운 아지매 국숫집은 마침내 값을 올렸다.

15전! 세배로 올린 것이다.
더 놀랄 일은 아지매 국숫집에 손님이 줄기는커녕 기다리는 줄이

가게 밖을 빠져나와 백자나 이어진 것이다.

한달 후엔 20전으로 올렸지만 여전히 손님은 미어터졌다.

술집도 아닌데 이경까지 문을 열었다.

마침내 할매 국숫집은 문을 닫고 할매는 화병에 고뿔까지 겹쳐 드러눕고 말았다.
할매의 또 하나 걱정거리는 열두살 먹은 손자 녀석이다.

핏줄이라고는 그놈 하난데 허구한 날 서당을 빼먹고 저잣거리에서

못된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며 속을 썩이더니

이제는 집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이다.

어느 날 저잣거리가 시끄러워 손자 녀석이 무슨 사고라도 쳤는가 싶어

할매가 아픈 몸을 이끌고 나가봤더니 길 건너 아지매 국수집에

사또의 진두지휘 아래 포졸들이 들이닥쳐 윤 첨지를 포승줄로 묶어 나오는데,

더욱더 놀랄 일은 사또 옆에 손자 녀석이 붙어 있는 것이다.
일은 이렇게 돌아갔다.
할매 국숫집이 문을 닫자 손자 녀석은 친구들과 함께

아지매 국숫집에 위장 취업을 했다.

이들은 장작을 날라다 육수 가마솥 아궁이에 불을 때는 일을 맡았다.

그런데 윤 첨지가 새벽마다 호리병에 누런 물을 담아와 육수 가마솥에 부었다.

악동들은 몰래 윤 첨지네 집에 숨어들었다.

윤 첨지는 뒤꼍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건초를 밤새도록 끓이더니

바짝 졸아든 건초 곤 물을 호리병에 담아 아지매 국숫집으로 가져왔다.

손자가 그 건초를 한움큼 훔쳐서 한약재상에게 보였더니 마른 아편 줄기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