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57)<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어…>

우현 띵호와 2021. 9. 24. 22:57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57)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어

외할머니와 살던 중업…산에서 땔나무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낯선 남자가 칼을 들이대며…

노가와 박가는 앞뒷집에 살며 함께 서당에 다니고 발가벗고 물장구를 치던,

형제보다도 가까운 불알친구였다.

열일곱, 머리가 굵어졌을 때 노가는 부모한테 물려받은

산자락 밭 몇 뙈기에 인생을 묶어둘 수 없다며 대처로 나가버렸다.

전날 밤, 죽마고우 두 친구는 밤새도록 술잔을 주고받았다.

5년 세월이 흐른 어느 초가을날.

고향땅에서 선친이 물려준 논밭에 땀 흘려 씨 뿌리고

얌전한 마누라 얻어서 떡두꺼비 같은 아들 하나를 두고 반듯하게

살아가는 박가 앞에 노가가 나타났다.

노가는 차림새도 세련되었지만 눈빛이 달라졌다.

동네의 형제들 집을 두고 박가네 사랑방에 똬리를 튼 노가는

술상을 가운데 두고 5년간 살아온 얘기를 청산유수처럼 쏟아냈다.

그해 겨울,

박가는 문전옥답을 거의 다 팔아 두둑한 전대를 허리에 차고,

친구를 따라 고향을 등졌다.

눈물을 훔치는 마누라에게 “몇 년만 기다려. 노다지만 찾으면

우리도 대처에 나가 떵떵거리며 살 거요.”

어미 등에 업힌 아들 중업을 꼭 안아보고 박가는 훨훨 고향땅을 떠나버렸다.

그게 중업이 제 아버지를 본 마지막이었다.

중업이 여덟살 때 집안이 울음바다가 되었다.

노다지를 찾아 함경도 무산고원을 헤매던 아버지가 발을 헛디뎌

천 길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시신도 못 찾았다는 것이다.

중업이 열살 때 외가에 맡겨지고 어미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떠돌아다니는 소문에 따르면 아버지와 죽마고우 노가는

노다지를 함께 발견했는데 노가가 낭떠러지에서 아버지를 떠밀어 죽이고

광산을 독차지하고 박가의 마누라도 차지했다는 것이다.

외할머니와 살던 중업이 어느 날 산에서 땔나무를 하고 있는데

검은 두루마기의 낯선 남자가 나타나 시퍼런 단검 칼끝을 중업의 목에 대고 말했다.

“잘 듣거라, 너는 이 자리에서 죽은 목숨이다. 나는 칼에 피 묻히기 싫다.

이 길로 멀리 도망가거라. 절대로 외가에 들르면 안 되고 앞으로 연락도 하지 마라.

네가 살아 있다는 게 알려지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 거야.”

날렵한 그 남자는 중업의 댕기 머리를 싹둑 잘라 어디론가 사라졌다.

혼이 빠진 중업은 털썩 주저앉았다.

외할머니에게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중업은 멀리 도망쳤다.

주막집 시동도 하다가 뱃사공 조수도 하다가 대장간 풀무질도 하다가

결국은 삭발하고 산 속 조그만 암자에서 노스님 밑에 동승으로 자리 잡았다.

양지바른 암자 쪽마루 턱에 앉아 중업이 물었다.

“스님, 그 남자는 왜 나를 죽이려 했을까요?”

먼 하늘을 바라보던 스님이 답했다. “노가가 보낸 자객이겠지.”

어렴풋이 중업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노다지를 발견한 후 박가를 낭떠러지에서 떼밀어 죽였다는 소문이 돌자

박가의 아들이 성장하여 제 아비 원수를 갚으러 올까 봐

겁이 난 노가가 자객을 보낸 것이다.

“그는 나를 왜 살려줬을까요?”

“아마도 노가가 수작을 부리는 걸 네 생모가 엿듣고

거금을 줘서 자객을 회유했을 거야.”

중업은 대장간에서 곁눈질로 배운 대로 틈틈이 부엌에서 호미를 불에 달궈

단검을 만들었다.

“언젠가 이 단검을 노가의 몸속에 깊숙이 꽂을 것이야!”

“원수를 원수로 갚으면 너도 같은 인간이 되는 거야.”

입이 닳도록 외는 스님의 말이 중업의 귀에 들어올 턱이 없었다.

중업은 암자에 박혀 있지만 노스님은 탁발하러 며칠씩 대처로 나갔다.

아흐레 만에 돌아온 노스님 입에서 곡차 냄새가 풍겼다.

“관세음보살…천망( 天輞)이 회회(恢恢)하여 소이불루(疎而不漏)니라.”

암자 마루에 털썩 주저앉은 노스님 왈

“대궐 같은 노가 집에 탁발을 갔느니라. 박꽃 같은 두 아들이 익사했더구나.

멱을 감던 아우가 물에 빠지자 형이 뛰어들었다가 둘 다 황천길로 갔어.

그 어미는 두 아들을 돌보러 가겠다고 목을 매고…나무아미타불.”

생모가 목을 맸다는 소식에 중업은 눈물을 훔쳤다.

“노가는 매일 밤 피를 한 요강씩 토한다네.

네가 그 칼로 목을 따주면 그의 고통은 편안하게 끝날 터인데….”

중업은 바랑 속의 단검을 깊은 소(沼) 속에 던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