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68) 동짓달 열이틀

우현 띵호와 2021. 9. 26. 23:35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68) 동짓달 열이틀

애 못낳아 시댁서 쫓겨나 국밥집 차린 막실댁
아이들 지켜보는 게 유일한 재미
세월 흘러 정신이 오락가락하는데…

막실댁은 시집간 지 삼년 만에 애도 못 낳는 석녀라고 소박맞고 쫓겨나와

친정에서 잠깐 눈칫밥을 먹다가 저잣거리 뒷골목에 국밥집을 차렸다.
새벽녘에 도살장에 가서 양지·사골·대창·머릿고기를 함지박에 담아와

무·대파 썰어 넣고 설설 끓여 뚝배기에 담아내면 장꾼들·노름꾼들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퍼먹고 갔다.

혼자서 장 봐오고 국 끓이고 상 차리느라 술은 아예 팔지를 않았다.

바쁘기도 하려니와 술손들 주정을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늦은 밤, 설거지를 끝내고 방바닥에 돈주머니를 쏟아보면 별로 남는 게 없다.

그러나 밖에는 북풍한설이 몰아쳐도 온종일 국 끓인 덕에 방은 설설 끓으니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집세 한번 밀린 적 없고, 도살장에 외상 한푼 없고, 무엇보다 시어머니

도끼눈초리 안 받고 친정집 올케 눈치 안 봐서 좋다.
막실댁은 손님이 없을 때 골목에 나가 뛰어노는 아이들을 구경하는 게 낙이다.

엄마 손을 잡고 가는 아이를 보면 빼앗고 싶은 생각이 치민다.

어느 날엔가는 덜컥 상상임신을 했다.

배가 불러오고 헛구역질을 하고 식초를 물에 타서 벌컥벌컥 마셔댔다.
“아들을 낳으면 용백이라 이름 지어야지.”
삼십년 세월이 쏜살같이 흘렀다. 막실댁도 늙고 병들었다.

함지박에 고기를 나를 수도 없고 무·대파 시장도 볼 수 없게 돼

국밥집 문을 닫고는 노상 드러누워 지냈다.

한해 한해 흐르자 정신도 오락가락해져 이웃 사람들이 가면

“우리 아들 용백이가 날 데리러 올 거야” 하고 헛소리를 해댔다.

이제 자기 먹을 밥도 못 하게 된 막실댁을

이웃 아낙들이 번갈아 와서 죽을 쒀 부양했다.
첫눈이 펄펄 쏟아지는 동짓달 열이틀. 훤칠한 남정네가 갓을 쓰고

비단 두루마기 자락을 휘날리며 골목으로 들어서더니 막실댁 집 문을 열고 들어섰다.
“내 아들 용백이냐? 네가 왔구나.
“네, 어머님. 제가 왔습니다.”
이튿날, 사십대 초반의 그 남정네는 말을 타고 막실댁은 하인 둘이 끄

가마를 타고 한양으로 갔다.

저잣거리 사람들로선 도통 영문을 몰랐지만 막판에

막실댁 팔자가 펴진 것만은 확실했다.
삼십수년 전, 저잣거리를 헤매던 열서너살 소년 천덕이는

다리 밑에서 거지 생활을 하다가 남의 가게 시동도 하다가

엿장수가 된 혈혈단신 천덕꾸러기였다.

저잣거리 애들은 눈을 뭉쳐 천덕이에게 팔매질을 해대고,

천덕이에게 외상엿을 먹은 치들은 푼돈 몇푼이 아까워 오리발을 내밀고,

엿치기하던 왈패들은 화풀이로 천덕이 엿판을 걷어차기 일쑤였다.

 

어느 날, 눈길에 나자빠졌다가 겨우 일어난 천덕이 옆으로

엿가락이 여기저기 흩어지고 엿판은 도랑에 처박혔다.

천덕이는 제 발로 엿판을 부수고 엿가락을 짓뭉갰다.

“이놈의 세상, 끝장을 내버려야지.” 천덕이는 만물상에서 부싯돌을 샀다.

그날따라 북서풍이 세차게 불었다.

저잣거리는 금세 불바다 잿더미가 될 터였다.
동짓달 토끼 꼬리 해가 숨고 어둠살이 깔렸다.

갑자기 시장기가 동한 천덕이가 골목 안 국밥집에서 국밥 한그릇을 해치우곤

드르륵 밀창문을 열고 냅다 뛰어 도망가는데,

따라나온 주인 아주머니가 소리쳤다.
“야 이놈아, 천천히 가거라. 빙판에 넘어질라.”
저잣거리 북쪽 끝 불 붙기 좋은 판잣집 옆에 붙어 앉은 천덕이가

짚북데기에 불을 붙이려고 부싯돌을 켜는데,

국밥 값도 안 내고 도망치는 놈에게 주인 아주머니가 한 말이 귀에 맴돌았다.

“천천히 가거라. 빙판에 넘어질라.” 천덕이는 얼어붙었다.

빙판에 넘어질라, 빙판에 넘어질라….

그날이 동짓달 열이틀이었다.
삼십수년이 흘러 동짓달 열이틀에 천덕이는 용백이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