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 김삿갓

방랑시인 김삿갓 01- (35)

우현 띵호와 2021. 9. 26. 23:46

방랑시인 김삿갓 01- (35)
*땡중과 마나님의 승부

석왕사에서 반월 행자와 작별을 한 김삿갓은

다시 북쪽을 향해 정처없는 발길을 옮겼다.
그러면서 금강산 입석암 노승을 비롯하여 반월 행자까지

불가에 귀이하여 수도를 하는 인물은 자신과 다르게

대단한 사람들 이라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고생을 스스로 선택한 그들의 삶은 김삿갓으로서는

따라할 수 없는 고행이 아니던가 ,

새삼 그들의 선택에 마음속 깊이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북쪽으로 가는 길은 계속 산길로 이어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 김삿갓은 다리도 쉬어갈겸 노견으로 물러나

반려 행자가 헤어질때 싸준 주먹밥을 풀어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만치 ,몸에는 장옷을 입고 머리에는 남바위를 쓴

행세 깨나 하는 양반댁 마나님 차림의여인이 하인도 없이

산길을 바쁜 걸음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허, 수행하는 종자도 없이 산길을 가다가 도둑이라도 만나면 어쩔려고 저러실까."
김삿갓은 마음 속으로 공연한 걱정을 하며

자리에서 툭툭 털고 일어나 길가로 나섰다.

그런데 여인이 지나간 얼마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남녀간 시비를 가리는 소리가 아득히 바람결에 들려왔다.

거리 관계로 말소리의 내용은 알수 없었지만 ,

주고 받는 말소리의 억양으로 보아 , 시비를 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저런, 조금전에 지나간 마나님이 산길에서

도둑이라도 만난 것이 아닐까 ? "
김삿갓은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어 부랴부랴

소리가 난 곳으로 바쁜 걸음을 옮겼다.

그리하여 얼마를 가다가 앞을 살펴보니,

저만큼 잔디밭에서 아까 지나쳐간 마나님이

오십 쯤 되어 보이는 스님과 말다툼을 하는 것이 보였다.

도둑을 만난 것이 아니기에 천만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젊잖은 댁 마나님이 지나던 스님과 무엇 때문에 싸우는가 싶어 ,

김삿갓은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기고 그들의 이야기를 지켜 보았다.

그때, 스님이 마나님의 손목을 움켜잡으려고 팔을 뻣으며 말을 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이 깊은 산중에서 한번쯤

정을 나누기로 뭐가 나쁘단 말이오 ? " 하고

해괴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 이었다.

"피차간 아는 사이인가 ? "

김삿갓은 이러한 생각도 들었지만 여인의 다음 대답으로

두 사람은 일면식도 없는 우연히 길을 가다 만나게 된

사이인 것을 알게 되었다.

"석존(釋尊)의 십계 중에 불사음계 (不邪淫戒)라는 대목이 뚜렸하거늘 ,

어찌 대사는 일시적 사념으로 파계 (破戒) 하시려 하오.

내, 오늘 일은 못보고 안 들은 것으로 할것 이니 사념을 버리고 수행에

전념 하도록 하십시오." 하며 점잖게 스님을 꾸짖고 있었다.

김삿갓은 그들이 다투는 이유를 그제야 분명히 알게 되었고

"저런 죽일 놈" 하고 자신도 모르게 스님에게 욕이 튀어 나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중놈의 부당한 요구에 자신의 입장을

당당히 내놓는 마나님의 태도에 존경심이 일었다.

그러나 욕정의 화신이 되어버린 중놈은 좀처럼 물러서질 않았다.
오히려 여인에게 금방이라도 덤벼들 자세로 꼬임의 말을 더하는 것이었다.

"만물은 인연의 소생이오.

우리가 깊은 산중에서 이렇게 단 둘이 만난 것도 전생부터의 인연일 것이오.

그대는 어찌 전생의 인연을 무시하고 , 나의 간절한 요구를 거절 하려 하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 두말 말고 나의 소원을 꼭 들어주시오."
그러나 마나님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의연하였다.

"대사는 무슨 당치않은 말씀을 자꾸 하시오.

반야경에 색즉시공(色即是空),공즉시색(空即是色)

이라는 말씀이 있지 않소이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씀인데,

이런 경전을 읽고 수행 하는 대사는 아직도 육근(六根)을 떨치지 못하고

탐욕과 진애 (瞋恚),우치 (愚痴)의 번뇌마에 시달리고 있는 모양이니,

한시바삐 자아의 세계에서 벗어나 해탈의 눈을 속히 뜨시오.

그것만이 불제자가 걸어가야 할 정도 일것 이오이다."

마나님은 불교에 대한 소양이 풍부한지 ,

중놈에게 설법 하듯 ,도도하게 꾸짖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애욕의 열정에 갇혀버린 환장한 중놈에게는

그런 말이 귀에 들어 갈리가 없었다.

중놈도 우격다짐으로는 성사가 안 될 것을 깨달았는지.

이번에는 방법을 바꿔, 이렇게 말을 했다.

"나는 그대와 더불어 불경을 토론할 생각이 없소.

나는 이미 그대를 범할 것을 결심했는데 ,

그대는 나의 소원을 끝까지 들어주려고 하지 않으니

그러면 우리는 말재주로써 승부를 가리면 어떠하겠소."

설득으로 성공할 자신이 없었음을 깨닫자 ,

중놈은 또 다른 방법으로 나왔다.

마나님도 계속 입씨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
"말재주로 승부를 결정하자는 것은 무슨 말씀이오니까 ? " 하고 다져 물었다.

중놈이 대답하는데 , "내가 지금부터 1,2,3,4,5,6,7,8,9,10의 순서로

그대에게 요구하는 일을 말로 들려 보일 터 인즉,

그대는 나와 같은 방식으로 대답을 해보시오.

만약 ,그대가 대답을 끊기지 않고 잘하게 되면 내가 순순히 물러날 것이로되 ,

만약 대답을 못해 막힘이 있게 되면 ,

그대가 진것이 되니 나의 말을 들어 주어야 하오."

김삿갓은 혀를 찼다. 도데체가 중놈의 요구는 부당하기 이를데 없으며 ,

노상에서 오가다 만난 생면부지의 여인에게 감히 몸을 요구하는가.

그런데도 마나님은 겁을 내는 기색조차 없이 중놈을 꾸짖었다.
"나는 이미 대사의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니

여러말 말고 물러나시오."

그러나 타이른다고 순순히 물러날 중놈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말재주로 결정하자고 이미 타협안을 내놓았소이다.

그러니 말재주로 승부를 결정 하던가, 나의 요구에 순순히 따라 주거나,

둘중에 하나를 선택하시오."

그늘속에 숨어서 이같은 광경을 지켜보던 김삿갓은

"저런 죽일놈을 보았나"하며 분노했다.

그리고 불현듯 뛰쳐나가 마나님을 구출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으나

상황이 그의 용기를 억누를 정도로 흥미진진한 면도 있었다.

따라서 저 마나님은 이같은 곤경을 어찌 벗어 냐려나 ? 하는 호기심 또한,

발동하여 좀더 지켜 보기로 하였다.

"좋소이다. 그러면 대사가 내기 말을 걸어 오시오. 내가 답 하리다."
마나님은 중놈의 고집을 꺾기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중놈의 내기에 응하고 있었다.

그러자 중놈이 이제는 됬다 싶었던지 크게 기뻐하며

즉석에서 내기말을 시작 하였다.
"일 , 일룡사 (一龍寺) 사는 중이
이, 이룡사 (二龍寺) 가는 길에
삼, 삼로 (三路) 길에서
사, 사대부인(士大夫人)을 만났는데
오, 오음 (五陰)이 불통하여
육, 육효 (六爻)로 점을 치니
칠, 칠괘 (七卦)도 좋다마는
팔, 팔괘 (八卦)는 더욱 좋다
구, 구부려라
십, † 좀 하게."
중놈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너무도 해괴한 소리였다.

김삿갓은 중놈에 이같은 음담패설에 저 마나님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걱정반 기대반을 가지고 지켜보며 마나님의 대답이 막혀 ,

땡중 놈에게 봉변을 당할 위기에 처해지면 자신이 나설때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마나님의 태도는 의연해 보였다.
그리고 중놈을 향하여 호통을 치는것 이었다.
"이 천하의 잡놈아 ! 내가 다시 한번 훈계를 내릴테니

그대는 똑똑히 내 말을 듣거라."
그리고 그녀는 말재주 내기에 대한 응답을 시작했다.

"일, 일편단심(一片丹心) 이 내 마음
이, 이심 (二心)이 있을 손가
삼, 삼강 (三鋼)이 살아 있고
사, 사리 (事理)가 분명 하거늘
오, 오할 (五割) 할 이 잡놈아
육, 육환장 (六環杖) 둘러 짚고
칠, 칠가사 (漆袈裟)를 걸쳐 입고
팔, 팔도 (八道)를 편답(遍踏)하며
구, 구하는게 고작
십, † 이더냐 이 잡놈아 !
마나님의 호통은 이렇게 추상같았다.

그리고 이제까지 "대사님 대사님"으로

돌중 놈을 깍듯이 예우해 주었으나,

이제와서는 오활을 할 잡놈이라 불호령을 질렀으니

그 위세가 실로 당당하기 이를데 없었다.

"예끼, 천하에 무서운 계집 같으니..."
중놈은 더이상 대꾸하지 못하고 그자리를 박차고 줄행랑을 노았다.

중놈이 도망가 버리자 마나님은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산 길을 다시 조용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참으로 존경할 만한 부인이기에 김삿갓은 먼빛으로 나마 ,

사라져가는 마나님을 향해 머리를 몇 번이고 수그려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