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 김삿갓

방랑시인 김삿갓 (01-36)* 방중 개존물 이요,선생 내불알 이라..

우현 띵호와 2021. 9. 26. 23:47

방랑시인 김삿갓 (01 -36)
* 방중 개존물 이요,선생 내불알 이라..
원산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김삿갓은 하루에

육십리를 걸어야겠다고 작정을 했는데 막상 길을 나서고 보니

그리 되지가 않았다. 하긴 바쁜 걸음도 아니었다.

길을 가다가 힘들거나 고달프면 아무 곳이나 앉아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어둠이 내릴 즈음

아무집이나 들려 하룻밤 묵을 것을 청하면 그만이었다.

이렇듯 여러날을 걸어가던 김삿갓은 오늘은 어쩐지

걷기가 도무지 귀찮아 한 마을로 썩 들어섰다.

때는 오후였다.

봄도 저물어 제법 더워지기 시작하는 오후의 햇살은

먼 길을 가는 나그네의 몸을 무척이나 나른하게 만들었다.

"오늘은 이쯤에서 쉬어 갈곳을 찾아야 하겠군."
가진 돈이 있다면 주막으로가 술이나 한잔 하고

그곳에서 묵으면 될것 이나 우선은 가진 돈이 없다.

이럴땐 동네 사랑방을 찾으면 밥은 못 얻어 먹더라도

그곳 동리의 인심을 엿볼수 있다.

혹간 밤이 깊어 출출한 시장기를 달래는 막걸리나

요기거리가 나오는 경우도 왕왕있어 김삿갓 처럼

무일푼 과객에게 동네 사랑방은 요긴한 하룻밤

쉬어갈 곳이 되곤하였다.

어느 동네나 잘사는 사람이 있다.

그중에서는 벼슬을 지냈거나 인심이 제법 후해 오가는

과객을 접대하는데 넉넉한 인정을 베푸는 집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해도 아직 지지 않은 이른 오후는

인심후한 집이나 동네 사랑방을 찾기는 너무 이른시간이었다.

해서 김삿갓은 서당을 찾아가기로 하였다.
서당은 살림집을 겸하는 경우가 없기에 학동들의 공부가 끝나면

빈방이 되기가 일쑤이고 지나는 과객의 하룻밤 휴식처로

안성마춤 이었다.

서당에 하루밤 쉬어 갈것을 청하기 이른시간이지만

그곳에 가서 학동들 공부하는 모습도 지켜 보면서

훈장 선생님하고 시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면

시간 보내기가 제일 좋을것 같았다.

그리고 뉘 알겠는가.멋들어진 훈장이라도 만나면

술이라도 한 상 내어 놓을지..

"애, 아가야 이 마을 서당은 어디 있느냐 ? "
삿갓은 꼴망태를 메고 오는 초립동이 녀석에게 물었다.

"서당은 왜 찾으셔요."
녀석은 삿갓을 눌러 쓰고 등에는 작은 행랑과 구절 지팡이를 짚고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다가온 김삿갓의 모습이 새삼스러웠던 듯

이렇게 반문 하였다.

"훈장 선생님을 만나려고 한다. 어디 있느냐 ? "
"저쪽 세번재 기와집이여요." 하며 손가락으로 가르킨다.
"그래, 고맙다."

김삿갓은 녀석이 가르쳐 준대로 서당을 찾아갔다. 서당은 제법 커 보였다.
마당도 넓었을 뿐 만 아니라 글방도 큼직 했는데

학동들은 열명이 될까말까 하였다.

"애들아 선생님 어디 계시냐 ? "
아이들은 선생님 없이 저희들끼리 글을 읽다가 불현듯 나타난

삿갓의 차림새를 보면서 대답은 하지 않고 저희들 끼리 수근거렸다.

"애들아, 선생님 어디 계시냐고 내가 묻지 않았더냐 ? "
삿갓은 다소 언성을 높였다.
어린것 들이 꽤나 버릇이 없어 보였다.
"누구신데 우리 사부님을 찾으세요."

그중 한놈이 눈을 말똥말똥 굴리면서 야무지게 물었다.
"이놈아 어른이 물으시면 대답이나 썩 할 일 이지 묻기는 왜 묻느냐 ? "
김삿갓은 울컥 괘씸한 생각이 들어서 호통을 쳤다.

그리고 학동놈들의 방자한 태도를 보아 선생이라는 작자의

인품도 가히 미루어 짐작이 되었다.

호통을 당한 녀석이 멀쑥한 표정을 짓더니 어물어물 말을 한다.
"선생님은 지금 안채에 계셔요."
"그래 너희들 글 공부는 가르치지 않고 들어 앉아 계신단 말이냐 ? "
"책이나 읽고 있으라고 하셨어요."
"허참, 까다롭구나. 길 가는 과객이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을까 하여

찾아 왔다고 말씀드려라."

녀석이 안채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찌푸린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선생님은 지금 나오실 수 없으니 그냥 돌아 가시랍니다."
"그래 ? "
김삿갓은 부화가 치밀었다. 꼴에 훈장이랍시고 거드름을 피우는 모양이었다.
삿갓은 아이들이나 훈장이나 그렇고 그런것 같아 머물기를 단념했다.

그렇지만 그냥 돌아서기에는 어쩐지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휘 돌아보니 마침 훈장의 탁자에는 갈아 놓은 먹과 종이가 보였다.
삿갓은 붓을들어 시 한수를 갈겨 써 놓았다.

서당내조지 생도제미십 書堂乃早知 生徒諸未十
방중개존물 선생내불알 房重皆尊物 先生來不謁
서당이란 내 일찍부터 알았거늘
공부하는 학동은 채 열이 안되는데 방안에 있는 녀석들은

제 잘난척 만 하고 선생이란 작자는 내다 보지도 않는구나.

"여봐라 이따 네 선생 오시거든 이 글을 드리거라."
김삿갓은 종이를 휙 내던지듯 놓고 방을 나와 침을 퇙 뱉고는

서당을 빠져나와 바람처럼 떠났다.

이무렵 훈장이란 작자는 거들먹 거리며 마누라에게 어깨 주무름을 받고 있었다.
"어 거참 시원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이렇듯 재미를 보고 있는데

생면부지의 과객이 왔다해서 어찌 나갈 수가 있겠나.
훈장은 낮잠조차 늘어지게 자고난 연후 ,마지못해 글방으로 건너왔다.

"선생님 아까 거지 같은 손님이 이 글을 써 놓고 가셨어요."
학동은 김삿갓이 써놓은 글을 선생에게 내놓았다.
"뭐냐 ? "
훈장은 실 눈을 뜨고 종이를 받아 읽는데,

차츰 얼굴색이 변하며 종이를 쥐고 있는 두 손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죽일 놈이 있나 ! "
훈장의 입에서 앙칼진 욕이 튀어 나왔다.
내용이야 그렇다치고, 써 놓은 글을 음에 따라 읽다보면 학동과

선생인 자기를 길거리 똥개를 욕하 듯이 써놓지 않았는가 ?

"허, 고약한 놈이로다."
훈장은 이를 갈았다. 이런 모양을 지켜 보던 아이 한 놈이 물었다.
"선생님 왜 그러셔요. 나쁜 말이라도 써있습니까 ? "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훈장이 불호령을 내렸다.

"네 이놈, 네가 무엇을 안다고 나서느냐. 당장 회초리 가져 오너라."
훈장은 엉뚱하게도 죄없는 학동을 잡으려는 심산이다.
그래야만 속이 풀릴것 같았다.

한편 훈장을 욕해준 김삿갓은 서당을 찾아 갈때 와는 달리 ,

훠이훠이 시원한 발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처음에 방랑 길을 떠났을 때는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만 들어도

분통이 터지고 화가 치밀었는데 이제는 조소와 박대를 당해도

세상인심이 그러려니 하고 대범하게 넘기게 되었다.

"흠, 지금쯤 그 알량한 훈장이 펄펄 뛰고 있겠군.."
김삿갓은 좀 심한 욕설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 자책감도 들었지만

거드름 피우던 그가 자기가 써 놓은 글을 읽고 핏대를

올리는 광경이 떠오르니 속이 다 시원하였다.

삿갓은 하늘의 구름을 쳐다보며 한참을 걸었는데

어느덧 석양의 노을이 물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목까지 컬컬한 것이 잠자리를 찾기 보다,

술 한잔 생각이 더욱 간절 하였다.

저녁 노을과 함께 김삿갓의 발걸음은 자연히 빨라졌다.
얕트막한 산모퉁이를 돌아서니 생각지도 않은 주막이 보였다.

김삿갓은 주막을 보니 반가움이 앞섰다.
하지만 그는 돈이 없지 않은가. 허실 삼아 빈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다.
돈이 있을리가 없었다.

김삿갓은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출렁출렁 뛰어 보았다.
그런데 ? 필낭속에서 분명히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것 참 , 이상하군. 아까도 뒷짐 속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더니.."

김삿갓이 등뒤에 지고 있는 행랑이라야 , 겨울 옷 한벌에

주먹만한 연적과 붓 몇자루와 고작하여 종이 몇 장과 벼루 뿐인데 ,

쇠붙이 소리가 나는 것은 의외였다.

그는 길가에 앉아 행랑을 끌러 보았다.
뜻 밖에도 엽전 꾸러미가 나왔다.

"돈이 ? "
김삿갓은 깜짝 놀랐다. 누구에게도 돈을 받은 일이 없는데 ,

돈이 있다는 것은 희안한 일이었다.

"허허, 이 무게도 보통은 아닌데, 내 어찌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 "
그는 손바닥 위에 엽전 꾸러미를 올려보며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족히 한근은 넘을 무게였다.
"그런데 이 돈을 누가 넣었을까 ?"
고개를 갸웃하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안변을 떠나올 때 사또가 내놓은 엽전은 이미 마다하지 않았던가 ?

게다가 그 돈은 가련이에게 보내겠다고 했으니 ,

사또가 별도로 넣어 주었을리는 없을테고 , 그렇다면 가련이 밖에는 없었다.

김사갓이 떠나 올때, 가련이 또한 노잣돈을 내 놓았지만

한사코 받지 않는 사이에 슬며시 넣어 준것이 틀림 없으리라..

생각이 이에 이른 김삿갓은 새삼스럽게 가련이의 뜨거운

사랑을 뼈저리게 느꼈다.

"감사하오 가련이..."
김삿갓은 백어(白魚) 같던 가련이의 손길을 만지는듯 엽전을 한동안 만지다가

필낭 속에 넣고 일부는 떼어 옆구리에 찼다.

갑자기 필낭의 무게가 천근처럼 무거워졌다.
"이만하면 내 오늘은 구걸을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김삿갓은 목을 한번 길게 빼밀어 보고

휘적휘적 주막을 향하여 발걸음을 떼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