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 김삿갓

방랑시인 김삿갓 (117) *필봉의 자승자박(自繩自縛)

우현 띵호와 2021. 9. 29. 22:57

방랑시인 김삿갓 (117)
*필봉의 자승자박(自繩自縛)

이윽고 술상이 들어오고, 필봉은 술잔을 나누며 다시 말한다.
"삿갓 선생에게 "동의보감"까지 배우면,

나도 만고에 빛나는 명의가 될 자신이 있어요.
그런데 그놈의 책을 구할 수가 있어야 말이지...."
김삿갓은 "명의"라는 말을 듣자, 불현듯 홍 향수가 와병(臥病)중인

사실이 떠올라 이렇게 물어 보았다.

"참, 조금전에 집 앞에서 매씨(妹氏)를 만났는데,

향수 어른의 병환은 아직도 좋지 않으신 모양이죠 ?"
필봉은 그 소리에 흠칫 놀라며,
"삿갓 선생이 내 누이동생을 만나셨던가요 ?

그애가 선생한테 무슨 말을 하지 않습디까 ?"

조금 전에 노상에서 만났을 때,

여정은 김삿갓에게 이상한 눈치를 보이며,
"언제 한번 선생님을 조용히 만나 뵙고 싶다"고

분명하게 말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필봉에게 하기가 거북스러워 김삿갓은 시치미를 떼고,
"노상에서 우연히 만나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을 뿐입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

혹시 매씨께서 나에게 무슨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시던가요 ?"

하고 넌즈시 물어 보았다.
필봉은 김삿갓에게 술을 권하면서 아무일도 아닌 것처럼 대답한다.
"그애가 조금 아까 나를 만나러 와서,

삿갓 선생의 옷에 대한 걱정을 하더군요."

"매씨께서 나의 옷에 대한 걱정을 하고 계시더라구요 ?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날씨가 추워져서 솜옷을 입을 때가 되었는데,

삿갓 선생은 아직도 겹옷을 입고 계셔서,

여자의 눈에는 무척 측은하게 보였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그애가 나더러 고 물어 보더군요.

나는 그거 참 잘 생각했다고 칭찬을 해주었답니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대뜸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말씀만은 고맙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춥지 않아서 솜옷을 갈아 입지 않았다 뿐이지,

솜옷이 없어서 겹옷을 입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행여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도록 전해 주십시오.
그런 일을 혹시 향수 어른께서 아시면 어떤 오해를 하실지 모르니까 말입니다."

여정이 솜옷을 지어 주겠다는 호의와 는 말 사이에는

깊은 관련이 있는 것만 같아서 김삿갓은 단호한 태도로 거절해 보였다.
필봉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침통한 표정으로 술만 마시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혼잣말로 중얼거리는데,
"향수 어른의 병세가 암만해도 심상치 않단 말이야."
"향수 어른의 병세가 심상치 않다뇨 ? 그게 무슨 말씀 입니까."
필봉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김삿갓을 마주 보며,
"선생이니까 말씀인데, 향수 어른의 앞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요."
"별안간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병세가 갑자기 악화라도 되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런건 아니지만, 사람은 먹어야 사는 법인데,

그 어른이 요즘에는 하루, 미음 한 공기로 간신히
연명을 해오시는 중이거든요.

그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오래 살 수 있겠소이까."

"일전에 읍내에서 지어 온 보약은 자셨는가요 ? "
"보약도 소화시킬 만한 기운이 있어야 효과를 보실게 아니오."
필봉은 거기까지 말하고 또다시 침통한 침묵에 잠겼다가,
"그애를 향수 어른에게 주어 버린 것은 나의 일생 일대의 실수였어."
하고 자탄하듯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필봉의 애타는 심정을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는 홍 향수의 돈과 세도를 이용하려고 누이동생을 소실로

들여 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러나 홍 향수가 너무 늙어서

남편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데다가, 덜컥 죽어 버리기라도

하게 되면 여정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될 것 아니겠나.

필봉은 지금 그런 경우를 생각하고

혼자 한숨을 쉬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자승자박(自繩自縛)이니,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할 것이랴.

김삿갓은 그런 일에는 관여하고 싶지 않아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하고 이렇게 말했다.
"향수 어른이 오늘 내일로 돌아가실 것도 아닌데,

왜 지나친 걱정을 하시오."

필봉은 술을 마셔 가면서,
"물론 나도 향수 어른이 오늘 내일로 돌아가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나 겨울을 무사히 넘길 수가 있을지는 매우 의심스러워요."
"인명은 재천이라고 했으니, 사람의 앞날을 누가 알 수 있겠소이까."

"그야 물론 그렇기는 하지요

. 당장 죽을 것 같으면서도 4,5년씩 길게 끄는 목숨도 없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나 어차피 늙고 기력이 쇠약해져,

죽을 사람이 목숨만 오래 끌면 무엇하오.

그럴수록에 누이동생의 신세만 비참해질 뿐이지요."
김삿갓은 이와 같은 우울한 화제에서 한시 바삐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 우울한 애기는 집어치우고 술이나 유쾌하게 마십시다.

이 좋은 술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술맛이 떨어집니다."
"알겠소이다. 그런 애기는 집어 치우고 술이나 마십시다."
술잔이 오고 가는 동안에 두 사람은 어지간히 취했다.

그러나 필봉은 아무리 취해도 누이동생 일만은 잊어버릴 수가 없었던지,

또다시 그 애기를 들고 나온다.
"어머니,아버지가 돌림병으로 한꺼번에 돌아가신 것은

그애가 여섯 살때의 일이었지요.

그때부터는 그애를 내가 맡아 길러 왔으니까,

그애는 말이 누이동생일 뿐이지 나에게는 딸이나 다름없는 아이에요."
"매씨 애기는 안하기로 해놓고

 그 애기를 또 끄집어내면 어떡합니까 ? "

"그애의 장래가 너무도 암담해 보여서 그래요.

본인이 싫다는 것을 내가 우겨서 향수 어른의 부실(副室)로 들여보냈거든요."

"아무리 그렇기로니, 이미 기정 사실이 되어 버린 마당에,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
"그야 그렇기는 하지만 ...."
필봉은 한동안 침통한 표정을 짓더니, 문득 이런 말을 한다.

"그애가 머지않아 과부가 될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만약 그렇게 되면 삿갓 선생은 그애를 불쌍하게 여겨서,

적당한 기회에 거두어 주실 용의는 없으시겠소 ?"

김삿갓은 필봉의 말을 듣고 기절 초풍을 할 듯이 놀랐다.

홍 향수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죽거든 그의 소실인 누이동생을 거두어 달라는 말은,

아무리 가상의 말이라 하여도 있을 수 없는 부탁이었기 때문이다.
"에이, 여보시오. 필봉 선생! 주정을 해도 분수가 있지, 그게 무슨 말씀이오.
그런 소리는 두번 다시 하지 마시오."
그러나 필봉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나는 주정이 아니고 진담이에요.

삿갓 선생도 언제까지나 독신으로 지낼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

"내가 왜 독신입니까.

관서 지방을 구경가는 길에 필봉 선생에게 붙잡혀서

이곳에 잠시 머물러 있을 뿐이지,

고향에는 처자식이 멀쩡하게 살아 있습니다."

"처자식이 있기로 그게 무슨 상관이오.

사내자식이 오죽 못났으면

마누라 하나만 데리고 산단 말이오.

그애는 제법 쓸 만한 아이라오.

가만히 보니까 그애도 삿갓 선생을 남몰래 흠모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다면 삿갓 선생의 옷 걱정을 할 이유가 없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애가 만약 불행하게 되거든,

선생이 그애를 꼭 거두어 주시오. 나의 간곡한 부탁이에요."

김삿갓은 그야말로 기가 찰 노릇이었다.

술 취한 사람을 상대로 더이상 애기를 해보았자,

귀결이 맺어질 것 같지 않아서,

"그런 애기는 그때에 가서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오늘은 술이나 마십시다."
하고 억지로 필봉의 말을 막아섰다.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김삿갓 생각에는,

필봉이 워낙 끈기가 강한데다 무슨 일이나 자기 본위로
밀어 붙이는 성격인지라, 그의 함정에 빠져들까 봐

내심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다를까, 필봉은 새삼스럽게 술을 권하면서,
"우리가 언젠가는 남매간이 될 것을 나는 꼭 믿고 있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술을 한잔 받아 주시오."
하고 나오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술잔을 받기는 하면서도 속으로는 겁이 나 견딜 수 없었다.

필봉이 언제 무슨 술책을 부려 자기를 업어 넘기려고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김삿갓은

그날부터는 이곳을 떠나 버릴 궁리를 골똘히 하게 되었다.
(어차피 나는 언젠가는 이 마을을 떠나야 할 몸이 아닌가 ?

그렇다면, 하루속히 후계자를 구해 놓고,

나는 나대로 다시, 방랑의 길로 오르리라.)

필봉과 헤어진 김삿갓은 후계자를 사방으로 구하면서 

필봉과의 만남은 의식적으로 피해가면서 날마다 망월정에

올라 가는 것을 유일한 즐거움으로 삼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