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 김삿갓

방랑시인 김삿갓 (118) *오랫만의 운우지정 (雲雨之情)

우현 띵호와 2021. 9. 29. 22:57

방랑시인 김삿갓 (118)
*오랫만의 운우지정 (雲雨之情)
김삿갓이 필봉을 경계하며 지내던 어느날 밤,

김삿갓이 정신없이 잠을 자고 있는데 이불 속에서 여자의 목소리로
"삿갓 선생님 ! "
하고 작은 소리로 김삿갓을 부르며 몸을 흔든다.
김삿갓은 자다 말고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나며,
"누구요 ?"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이불 속의 여인은 놀라 일어나려는 김삿갓의

몸을 짓누르며 침착한 어조로,

"삿갓 선생님 놀라지 마세요. 저예요."
"저가 누구요 ? "
"필봉의 누이동생 여정이예요."
"엣 ? 여정 여사 ?"
김삿갓은 다시 한번 놀라며,
"여사가 어떻게 여기에 와 있소 ?"

자다가 놀라 잠을 깬 김삿갓의 손에 닿는 여인의 몸은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알몸뚱이였다.

불시에 잠을 깬 김삿갓의 코에는 젊은 여인이 알몸뚱이로 누워 있는 탓인지,

이불 속에서는 향기로운 지분 냄새가 정신을 황홀하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여정은 김삿갓의 팔을 힘주어 움켜잡으며 호소하듯 속삭인다.

"오라버니 께서 오늘밤 삿갓 선생님을 모시라는 말씀이 계셔서

체면없이 이렇게 모시러 온 것입니다."
"뭐요? 필봉이 나를 모시라고 해서 왔다구요?"
"오라버니의 말씀이 없었더라도

저는 오래 전부터 삿갓 선생님을 사모하고 있었어요."
"당신은 무슨 소리를 하고 있소.

당신에게는 홍 향수가 있는데 이럴 수가 있소 ?"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김삿갓은 젊은 여인의 육체가 몸에 닿는 순간부터,

전신이 후끈 달아오르는 본능적인 욕구가,

터져 나오려는 화산 처럼 꿈틀거렸다.

" ......."
여인은 김삿갓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말이 없었다.
그제야 깨닫고 보니, 여인은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여인이 울고 있음을 깨닫자, 김삿갓은 별안간 측은한 생각이 밀려들었다.
"울기는 왜 우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애기 좀 들어 봅시다."
여인은 한동안 말이 없더니,

이윽고 울음 섞인 음성으로 호소 하듯 말한다.

"홍 향수는 명색이 영감님일 뿐이지,

저한테는 있으니 마나 한 사람이에요.

저는 그 양반이 처음부터 싫었지만,

오라버니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서 어쩔수 없이

그 집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예요."

"싫으면 처음부터 들어가지 말아야 할 일이지,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하면 어떡하오 ?"
김삿갓은 못마땅하게 여겨져서 의식적으로 꾸짖어 보였다.

그러자 여인은 어깨가 들먹이도록 울어 대더니

, 문득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때만 하여도 제가 철이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러나 삿갓 선생님을 알고 나서는 제 생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졌어요."
"생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다니, 뭐가 어떻게 달라졌다는 말이오 ?"
김삿갓은 그렇게 반문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여인의 등을 정답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여인은 김삿갓의 팔을 두 손으로 힘주어 움켜잡으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철이 없었을 때에는 돈만 많으면 인생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아갈 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정작 그 처지가 되고 보니

인생이란 돈만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어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은 옳게 생각했구려.

인생이 돈만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저는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체면 불고하고

이렇게 삿갓 선생님을 찾아오게 된 것이에요.

오라버니께서 삿갓 선생을 모시라는 말씀도 계셨지만

오라버니의 말씀이 없었더라도 저는 언젠가는

삿갓 선생님을 반드시 찾아왔을 거예요."

여정은 그렇게 자신의 처지를 눈물로 호소하며

김삿갓의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이렇다 보니, 김삿갓이 제아무리 도덕 군자이기로,

여인의 유혹을 물리쳐 버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자신도 모르게 여인의 몸을 힘차게 끌어당기니,

여인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전신을 송두리째 내맡기며 접근해 왔다.

김삿갓은 오랫동안 금욕 생활을 해오던 처지인지라,

굶주린 호랑이가 살찐 암캐를 낚아채 듯이 사정없이 덤벼들었다.

여인도 오랫동안 애욕에 굶주려 온 듯,

사나이의 포옹을 뜨겁게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김삿갓이 여인의 몸을 완전히 점령한 순간,

문득 다음과 같은 의혹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나는 지금 필봉의 흉악한 음모에 걸려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

그러나 그런 의혹에 연연하여 여인을 떨쳐 버리기에는

눈앞에 향락이 너무도 황홀하였다.

여정도 오빠를 닮았는지 의욕과 끈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한차례 폭풍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김삿갓의 온 몸을 더듬어 가며,

또다시 향락의 길을 재촉했다.

이렇게 두 남녀간에,

한번 터진 봇물은 동녘이 밝아 오도록 몇 번이고 되풀이 되었다.

이윽고 멀리서 새벽 닭소리가 들려 오자,

여정은 그제야 자기 정신으로 돌아왔는지,

이불 속에서 일어나 앉으며 무척이나 아쉬운 어조로 말한다.

"날이 밝아 와요. 누가 보기 전에 저는 돌아가야겠어요."
알고도 남을 만한 소리다.
"남에 눈에 띄기 전에 어서 돌아가시오."
"제가 돌아가고 나거든 한잠 더 주무세요.

이따가 오라버니께서 무슨 말씀이 있겠지만,

오늘밤이나 내일 저녁이나 형편 보아서 또 오겠어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전신에 소름이 쭉 돋았다.
왜냐하면, 자기는 지금 필봉의 음흉한 계략에

말려들었음을 분명히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일어서려는 여정의 치맛자락을

부랴부랴 움켜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