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 김삿갓

방랑시인 김삿갓 (119) *필봉의 흉계를 간파(看破)한 새벽의 탈출.

우현 띵호와 2021. 9. 29. 22:57

방랑시인 김삿갓 (119)
*필봉의 흉계를 간파(看破)한 새벽의 탈출.
"잠깐만 ...가기 전에 말 좀 물어 봅시다."
여정은 하룻밤 사이에 정이 들었는지,

김삿갓의 어깨를 이불로 감싸 주면서 스스럼없이 말한다.
"고단하실 텐데 주무시지 않고 무슨 말을 물어 보시려고 그러세요."
김삿갓은 여정이 과부가 되더라도, 그녀와 결혼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무슨 까닭으로 알몸으로 이불 속으로 침입해 왔는지

배후의 인물과 이유 만큼은 분명히 알고 싶었다.
"우리 이제 헤어지면 언제 또 만나지 ?"
말할 것도 없이 여정이 안심하고 입을 열게 하려는 김삿갓의 의도였다.

아니나다를까, 여정은 자못 행복스런 웃음을 보이며

김삿갓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아까는 맘대로 찾아왔다고 야단을 치시더니, 그동안 마음이 변하셨어요?"
"우리는 이미 남남지간이 아니지 않은가, 이제는 그럴밖에 없지 않아 ?"
김삿갓은 손을 뻣어 여정의 젖가슴을 만지던 손을 엉덩이 쪽으로 옮겨

정답게 어루만져 주다가 별안간 생각이 난 것처럼 물었다.

"참, 당신은 오라버니가 나를 모시라고 해서

마지못해 찾아온 것처럼 말했는데,

오라버니가 당신에게 그렇게 말을 한 것이 사실인가 ?"

여정은 김삿갓이 당신이라는 말로 자신을 불러주자,

얼굴에 기쁨에 빛이 들면서 눈이 초롱초롱 해졌다.

그러나 대답만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잠시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오라버니가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사실이에요.

그러나 저는 오라버니의 말씀이 없었더라도

언젠가는 삿갓 선생님을 찾아왔을 거예요.

저는 그만큼 삿갓 선생님을 사모하고 있었던걸요."

"나같이 못난 사람을 그처럼 사모하고 있었다니 고맙군그래 ..

오라버니가 뭐라고 하면서 나를 모시라고 하던가 ?"

"향수 어른이 돌아가시거든 삿갓 선생님과 결혼시켜 줄 테니,

지금부터 정을 통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음 ! 필봉이 그런 생각으로 당신을 내게 보냈구먼."

김삿갓은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고개를 끄덕여 보였지만,

실상인즉 필봉의 무시무시한 음모에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여정은 김삿갓을 잠시 묵묵히 바라보다가,
"혹시 삿갓 선생님은 어젯밤의 일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에요 ?"
김삿갓은 당황히 고개를 흔들었다.

"천만에 ! 내가 후회할 리가 있는가.

그러나 홍 향수가 언제 죽을지 그게 문제거든 ! 한두 달쯤 뒤에
죽는다면 기다릴 수 있지만 일 년후에 죽을지,

이태 후에 죽을지 그것만은 모르는 일이 아닌가."
그 말에 여정은 자신 있는 어조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니에요. 결코 오래 가지는 못할 거예요."
"오래가지 못하다니 ?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그러자 여정은 김삿갓의 손을 꼭 움켜잡고 한동안 말이 없더니,
"이 애기는 누구한테도 말할 수가 없는 일이지만,

그 영감님은 열 흘안에 꼭 돌아가시게 되어 있어요." 하고

속삭이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여정의 말을 듣고 가슴이 섬뜩하였다.

홍 향수가 열 흘안에 꼭 죽게 된다고 확언하는 것을 보면,

필봉과 여정은 공동으로 모의를 하여 홍 향수에게 독약이라도 먹여,

죽이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여정이 어떻게 그런 장담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겪어 온 필봉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위인임이 틀림 없어서,

누이동생 여정조차, 한밤중에 김삿갓의 이불 속으로

알몸으로 덤벼들어 가게 시키지 않았던가.

김삿갓은 음모의 진상을 좀더 상세히 알고 싶어,

슬쩍 이렇게 물어 보았다.
"홍 향수는 지난 겨울부터 돌아가신다고 하면서

아직도 살아 있는 분이 아닌가 ?
그런 분이 열흘 안으로 죽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겠느냐 말야."
여정은 또다시 자신 있게 대답한다.
"그 문제는 걱정하실 것 없어요. 오라버니가 그러시는데,

이번만은 틀림없이 돌아가신다는 거예요."

"나는 당신 오라버니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다니까 그러네,

지난 겨울에도 이번 겨울을 넘기지 못 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아직도 살아 있지 않은가 ?

그러니 당신 오라버니 말씀은 믿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이번만은 사정이 달라요."
"다르기는 뭐가 달라, 우리 사이에 숨길 일이 뭐가 있겠는가.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해 주어요.
그래야 나도 당신을 믿고 마음의 자세를 가다듬을 것 아닌가."
그 말에 여정은 무척 감격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사실대로 털어 놓기가 너무도 거북스러운지

한동안 주저하는 빛을 보이다가,

"오라버니가 이번만은 그 양반한테 특별한 약을 쓰고 계신 것 같아요."
하고 조그맣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자신의 추측이 적중한 데 대해,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놀라며,
""특별한 약이라니, 대체 무슨 약을 쓰고 있기에 ?"
하고 예사롭지 않게 물어 보았다.
그러나 이 문제 만큼은 여정도 정확하게 대답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라버니가 어떤 약을 쓰고 계시는지 그것만은 저도 몰라요."
김삿갓은 그 대답 한마디로 필봉의 음모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필봉은 지금 홍 향수를 독살하려고

그에게 보내는 약에 독약을 섞어 먹여 오고 있었던 것이다.

김삿갓은 필봉의 엄청남 음모를 속속들이 알고 나자,

여정을 더이상 붙잡아 둘 이유가 없었다.

그러면서 여정을 안심시키기 위해 여정의 등과 엉덩이를

의식적으로 정답게 어루만져 주면서 이렇게 말을했다.

"홍 향수가 열 흘안에 죽게 되면 ,

우리들은 그때부터는 마음대로 만날 수 있게 되겠지 ?"
"그 양반만 돌아가시면 저희들의 문제는 마음대로 될 수 있을 거예요."
"알았어 ! 그러면 그때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늦기 전에 어서 가 보아요 ! "
"그럼, 가겠어요. 무슨 일이 생기면 곧 알려드리겠어요."
여정은 커다란 희망을 품고, 유령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휴우 ...."
김삿갓은 잠자리에 털썩 누워 버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필봉은 지금 홍 향수를 독살하고 있는 중인데,

그를 살려 낼 무슨 방도가 없을까 ?)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병이 이미 골수에 들어 송장이나 다름없게 되어 버린 홍 향수를 억지로
살려 내려고 애쓰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 같았다.
그보다도 깊이 생각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의 문제였다.
(가만있어보자, 홍 향수가 죽고 나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
물어 보나 마나, 필봉은 홍 향수를 죽이고 나면,

여정을 김삿갓과 강압적으로 결혼시키려고 덤빌 것이 뻔한 일이다.

누이동생을 한밤중에 김삿갓의 이불 속으로 들여보낸 것도

그에 대한 전주곡이 분명하였다.

만약 필봉의 마수에 걸려들어,

싫든 좋든 간에 여정과 깊은 관계가 맺어지게 되면,

삿갓 자신은 훈장 신세를 영원히 면하기 어려울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생각만 하여도 몸서리칠 노릇이었다.
(그건 안 될 말이다. 사태가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엇을 주저하랴.

내가 살기 위해서는 당장이 시간에 멀리 도망을 쳐버려야 한다.)

김삿갓은 별안간 용수철 퉁기듯 벌떡 일어나,

부랴부랴 옷을 추스려 입기가 무섭게 삿갓을 깊숙이눌러 쓰고 밖으로 달려 나왔다.
필봉의 무시무시한 마수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삼십 육계만이 있을 뿐 이었다.
(가자, 나는 어디까지나 나의 길을 가야 한다.

그동안 본의 아니게 훈장 노릇을 해온 것은 순전히
살아가는 과정에서의 외도에 지나지 않았다.

나로 인해 억울한 죽임을 당할 홍 향수가 천명을 다 할 수

있도록 하고, 필봉으로 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누리자 ! )

김삿갓은 마음 속으로 그렇게 부르짖으며 새벽의 탈출을 감행하였다.
이른 봄의 새벽 공기는 살을 에이는 듯 차갑다.
그러나 김삿갓은 누군가 추격을 해올 것만 같아서 숨 가쁘게 걸음을 옮겨 나갔다.
얼마를 가다 보니, 동쪽 하늘이 환히 밝아 오고 있었다.
김삿갓은 그제야, 그동안 잃어버렸던 자기 자신의 세계를 되찾은 것만 같아서,

가슴을 활짝 펴며 기운차게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