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89)<한눈에 반하다

우현 띵호와 2021. 10. 5. 02:19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89)<한눈에 반하다>

단옷날 그네여왕 춘화

그녀에게 한눈에 반했다는 씨름장사와

혼례를 치르고 첫날밤 펑펑 우는데…

“지화자~ 지화자 좋다. 녹음방창(綠陰方暢)에 새울음 좋고 지화자~.”

기생 일곱이 뽑아내는 가락에 단오 분위기는 한껏 부풀어 올랐다.

가림막 아래 멍석을 깔고 사또와 육방관속, 고을 유지들은

술잔 돌리기에 여념이 없고 드넓은 아랑천 모래밭은

이골저골 열아홉마을에서 모인 남녀노소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천변의 회나무 그넷줄은 노랑저고리 분홍치마를 매달아 올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씨름판의 함성은 천지를 뒤흔들었다.

기나긴 오월 햇살이 비스듬히 누울 즈음, 씨름판도 결판이 났고

그네도 여왕이 탄생했다.

오매골 노첨지의 셋째딸, 춘화는 올해도 그네 여왕이 되어

사또로부터 비단 세필을 받았다.

그런데 춘화의 가슴이 방망이질친 건 비단 세필 때문이 아니었다.

황소 등에 올라탄 씨름장사가 춘화에게 한쪽 눈을 감으며

찡긋 눈웃음을 보냈기 때문이다.

고을 단오잔치가 파하자 이골저골 사람들이 아랑천 모래벌판을

빠져 나가느라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때 수리취떡장수 아지매가 사람들 틈을 비집고 춘화에게 다가오더니

꼬깃꼬깃 접은 한지 한장을 앞섶 가운데 찔러 넣어주며 배시시 웃었다.

비단 세필은 친구들이 안고 춘화는 쪽지를 꺼내 읽다가 얼굴이 홍당무로 변했다.

“낭자! 낭자가 그네타는 모습은 선녀가 하늘에서 무지개를 타고 내려오는 것 같았소.

소인은 한눈에 반했소이다. 내일 밤 운안골 물레방앗간에서 기다리겠소.

낭자가 올 때까지 천년만년 기다리겠소. 황소 장사가.”

‘아까 찡긋 눈웃음을 보내던 그 장사야.’ 춘화는 온몸이 불타올랐다.

춘화는 저잣거리를 지나며 포목점에 들러 상으로 탄 비단 세필 가운데

한필을 팔아서 동네 친구들에게 박가분 한통씩을 사서 안겼다.

또 너비아니집에 들러 고기를 실컷 먹고 술도 한잔씩 마셨다.

춘화는 어스름한 저녁에 비단 두필과 식구수대로 선물을 사서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노첨지와 마누라는 반기는 기색조차 없다.

위로 두딸은 문밖 출입을 모르는 조신한 처자로 자라 양반집에

시집가 잘살고 있는데, 셋째딸 춘화는 허구한 날 집 바깥을

싸돌아다녔기 때문이다.

그날 밤, 춘화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구릿빛 드넓은 가슴팍,

한눈을 감고 싱긋 웃는 그 눈길, 황소 위에 올라앉아 두팔을 번쩍

추켜올린 늠름한 모습이라니….

이튿날 밤, 춘화는 장독을 밟고 감나무 가지를 잡아 담을 넘었다.

약속장소인 물레방앗간으로 한달음에 달려가 삼경 무렵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칠흑 같은 밤길을 함께 걸어온 황소 장사가 엉덩이를 떠받쳐 줘 수월하게 담을 넘었다.

두어달이 지나자 노첨지 내외가 걱정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셋째딸 춘화가 입덧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몇날 며칠 술만 퍼마시던 노첨지가 춘화를 다그쳐

이십리 밖 청송골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산다는

황소장사를 찾아 부랴부랴 혼례를 올렸다.

상놈 집안에 바깥사돈도 없는 덩치만 커다란 놈을 사위라고 맞으니

노첨지는 맘에 들지 않아 절을 해도 고개를 돌렸다.

웃음이 넘쳐야 할 혼롓날,

새신부 춘화는 부모님이 하도 슬퍼하는 통에 기가 푹 죽었다.

설상가상으로 첫날밤, 춘화는 기절할 뻔했다. 신랑이 애꾸였던 것이다.

“나를 속였군요.” 춘화는 펑펑 울었다. 그러자 황소 장사가 대꾸했다.

“나는 낭자를 속인 적이 없소. 지난 단옷날 수리취떡장수를 통해

낭자에게 준 쪽지를 보시오. 한눈에 반했다고 하지 않았소. 한눈에.”

그렇게 한해 두해 지나자 노첨지의 걱정거리가 싹 바뀌었다.

첫째딸은 애를 못 낳는다고 소박당해서,

둘째딸은 사위가 첩살림을 차렸다며 보따리를 싸서 친정에 아예 눌러앉았다.

반면에 셋째딸은 토실한 알부자 황소장사가 한눈을 절대 안 팔아

가을무 뽑듯이 아들 둘을 낳았다.

게다가 셋째 사위는 산에서 송이 땄다고, 하수오 캤다고,

산삼 캤다고 노첨지에게 먼저 보내왔다.

또 시시때때로 산머루주 익었다고 독째 보내고,

장터에서 한산모시 두필을 사서 보내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