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87)<곳간열쇠>

우현 띵호와 2021. 10. 5. 01:59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87)<곳간열쇠>

기품있고 우아한 현덕부인

남편이 기생과 살림차려 집 나가자

곳간을 열고 쌀을 퍼내…

현덕부인은 우아한 기품이 향기처럼 온몸에서 우러난다.

말이 별로 없지만 언제나 자상한 미소를 띠고 있다.

이날 이때껏 하인과 하녀들이 잘못을 저질러도 매운 질책 한번 하지 않고,

이웃들과 말다툼 한번 하지 않았다.

그러니 남편 우 진사에게도 말대꾸 한번 하지 않았다.

시간 날 때면 여덟폭 병풍에 둘러싸여 사군자를 치는 게 현덕부인의 낙이다.

남편 우 진사도 점잖은 선비다.

우 진사는 현덕부인을 외경하지만 딱 한가지 불만이 있었다.

늦은 밤 사랑방에서 글을 읽다가 살며시 안마당을 건너 헛기침을 하며

안방에 들어가 촛불을 끄고 현덕부인의 옷고름을 풀면

그때부터 부인은 얼어붙는다.

혼례를 올린 지 십년이 지났건만 현덕부인은 첫날밤처럼 목석이다.

속치마를 벗기고 고쟁이를 내려도 경직된 채 싸늘하게 눈을 감고

똑바로 누운 자세 그대로다.

우 진사가 가쁜 숨을 토해내도 현덕부인의 숨소리는 잠자는 듯 고요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현덕부인이 날벼락을 맞았다.

부쩍 외박이 잦던 우 진사가 현덕부인을 앉혀 놓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부인, 내가 둘째부인을 얻어 저잣거리에 살림을 차렸소.

부인은 이해해 주리라 믿소.”

현덕부인은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 없이 눈물을 떨어뜨리더니

급기야 치마폭으로 얼굴을 감싸고 어깨를 들썩였다.

우 진사도 벼르고 별러 입을 떼었지만 가슴이 찢어질 듯 부인이 애처로웠다.

“부인, 미안하오.”
우 진사는 허리춤에서 곳간열쇠를 풀어 부인의 치마 위에 올려놓고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시앗을 얻은 우 진사는 이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들리는 소문에는 저잣거리 기생집에서 우 진사가 새로 온 기생의 머리를

얹어주고 살림을 차렸다는 것이다.

상심한 현덕부인은 드러누웠다.

그러나 달포가량 지나자 눈물을 닦고 일어났다. 겉모습도 달라졌다.

새빨간 치마끈에 곳간열쇠들을 주렁주렁 달아 걸음을 뗄 때마다

철그렁철그렁 소리가 났다.

현덕부인은 곳간을 열고 쌀을 두말이나 퍼내 시루떡을 쪄서

하인과 하녀들이 배불리 먹도록 했다.

보릿고개에 동네 어느 집의 쌀독이 비었다 하면 서슴없이 곡식자루를 보냈고,

동냥 온 거지에게도 따뜻한 밥상을 차려 주었다. 또

초파일에 와불산 암자를 찾았다가 조그만 절간 기둥이 썩어 기울어지고

비가 샌다는 젊은 스님의 하소연을 듣고 선뜻 개축공사 비용을 부담했다.

불당과 요사채 한칸만 붙어 있는 그 암자는 원래 노스님이 홀로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강보에 싸인 아이 하나를 키워 그 아이가 열아홉살이 되었을 때

노스님이 입적하자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여섯달 공사 끝에 단청을 끝내던 날, 현덕부인은 백일기도에 들어갔다.

백일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내려왔을 때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현

덕부인의 얼굴에서 수심이 사라지고 화사한 미소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와불산 암자에서 백일기도를 하는 동안 현덕부인은 두가지 사실을 터득했다.

첫째는 곳간에서 인심만 나오는 게 아니라 힘도 나온다는 것.

둘째는 곳간 덕에 음양(陰陽)의 이치를 깨달았다.

남편이 왜 시앗을 얻어 딴살림을 차렸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어느 날, 해질녘에 길가던 젊은 선비가 드넓은 사대부 집을 찾아 들어섰다.

현덕부인은 융숭하게 주안상을 올리고 사랑방에 이부자리도 보아 놨다.

그리고 밤은 깊어 삼경일제 홑적삼에 홑치마만 걸친 현덕부인이 사랑방으로

스며들어 현란한 요분질로 선비의 객고를 풀어 주었다. 이튿

날 아침 떠날 때엔 단봇짐에 두툼한 노잣돈까지 찔러 줬다.

이따금 와불산 암자승도 한밤중에 내려왔다.

곳간열쇠는 너무나 든든하고 고마운 존재였다.

현덕부인은 우 진사가 집에 들어오지 말고 오래오래 시앗을 데리고 살라며

보약까지 지어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