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28) <씨받이>

우현 띵호와 2021. 10. 10. 01:58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28) <씨받이>

강 진사댁 씨받이가 된 찬모 꽃님이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았는데…

강 진사는 젊지만 점잖은 선비다.
조정의 기강이 무너지고 매관매직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뜻 맞는 선비들과 시를 짓고

술잔을 기울이며 세월을 낚는다.

풍채 좋고, 입이 무겁고, 온후한 인품으로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수많은 소작인들도 강 진사를 하늘처럼 우러러본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소작인들이 갖고 오는 나락가마를 적다고

호통쳤던 집사가 강 진사에게 불려가 주는 대로 받으라고 꾸지람을 들었다.

한번은 찬모 꽃님이 숭늉을 들고 사랑방으로 갔을 때

식사를 하던 강 진사가 ‘딱’ 돌을 씹고 두손으로 입을 감쌌다.

너무 놀란 꽃님이 뜨거운 숭늉 그릇을 떨어뜨렸다.

입에서는 깨진 어금니가 나오고 바지는 숭늉에 젖었는데

그 와중에 강 진사는 “꽃님아, 앞으로는 돌비빔밥을 하지 말아라.

내 식성에 맞지 않구나”라고 웃으며 농담을 했다.

부자에 인물 좋고 덕 많은 강 진사에게도 딱하나 모자란 게 있으니 바로 자식이다.

삼신할미에게 빌고, 방방곡곡 용하다는 의원을 찾고

절에 가서 백일기도를 해도 강 진사 부인 임계댁에게 태기는 서지 않았다.

어느 날 임계댁은 꽃님을 불러 앉혀 놓고 긴 한숨을 토했다.

“꽃님아, 내가 강씨 문중에 시집와 이 집 대를 끊게 생겼구나.

나를 좀 살려주고 이 집도 살려다오.”

이튿날 아침, 눈이 퉁퉁 부은 꽃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꽃님이 뒤뜰 별당으로 거처를 옮기고 밤이면 강 진사가 별당으로 가

합방(合房)을 하기 시작했다.

보름에 한번쯤 안방을 찾던 강 진사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밤을 별당에서 지새웠다.

임계댁이 뒤꿈치를 들고 고양이 걸음으로 뒤뜰로 가

별당 들창문 아래서 귀를 세웠다.

“꽃님아 음양의 조화가 이렇게 오묘한 줄 몰랐구나.”

“나으리, 소첩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나으리 품에 이렇게 안겨 있으니. 아~흑” “척, 퍽, 척, 퍽” “아~” “헉헉헉”

황소가 진흙 뻘에 발이 빠졌다가 빼는 소리, 자지러지는 감창….

임계댁은 질투에 몸을 떨며 안방으로 돌아갔다.

열여덟살 꽃님은 꽃처럼 피어났다.

십칠년 전 어느날 아침, 임계댁 친정집 대문 밖에서 강보에 쌓여 울고 있는

갓난아기를 안고 들어왔을 때 임계댁은 열살이었다.

이제, 임계댁의 몸종이 남편의 씨받이가 된 것이다.

꽃님의 달거리가 끊기자 임계댁이 그녀를 찬모방으로 보내고 강 진사의 발길도 끊었다.

입덧이 시작되고 몇 달 뒤 꽃님은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았다.

꽃님의 젖을 문 시간 외에 애기는 강 진사의 품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렇게 해가 바뀌어 애기의 돌이 가까이 다가왔다.
임계댁이 꽃님이에게 돈 꾸러미를 주며 집사를 따라 장에 다녀오라 일렀다.

생전 처음 장에 가보게 된 꽃님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20리 밖 장터 가는 길은 고개를 두개나 넘어야 한다.

임계댁 친정 먼 친척인 집사는 빈 지게를 지고 꽃님은 뒤를 졸졸 따랐다.

“좀 쉬었다 가세” 집사가 바위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고 땅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는데 그곳은 길이 없는 외딴 숲속이다. 집사가 이어 입을 열었다.

“꽃님이,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말게나”
품에서 시퍼런 손칼을 꺼내더니 꽃님의 댕기머리를 싹둑 잘랐다.

꽃님이 부들부들 떨며 털썩 주저앉자 집사가 말했다.

“어디로든지 멀리 떠나게. 두번 다시 나타나면 자네도 끝이고 나도 끝이네”

그날 밤, 강 진사가 임계댁에게 물었다.
“꽃님이는 어디 갔소?” “넉넉하게 전대를 채워 멀리 보냈습니다.

나으리와 제가 굳게 약속한 대로”

강 진사는 밤새 흐느껴 울더니 술로 세월을 보냈다.

3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한 여승이 고깔을 깊이 쓰고 강 진사댁에 탁발을 왔다.

마당에서 또래들과 놀던 강 진사 아들이 쪼르르 달려가

여승의 손을 잡고 고깔 속의 얼굴을 쳐다봤다.

사랑방에서 그 모습을 본 강 진사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여승은 강 진사의 아들을 꼭 껴안아 보고선 바람처럼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