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27)<권세마을>

우현 띵호와 2021. 10. 10. 01:47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27)<권세마을>

천하명당 양반마을에 주막이 들어서고

동네 남정네들 몹쓸병 걸리는데…

뒤로는 산이 병풍을 두르고 남향으로 문전옥답 들판이 끝없이 펼쳐졌다.

그 너머 마르지 않는 강이 승천하는 용처럼 휘돌아 흐르니

이 마을이야 말로 배산임수(背山臨水) 천하명당이다.

100여호가 사는 이 마을을 사람들은 권세(權勢)마을이라 부른다.

초가 한채 없이 날아갈듯 처마끝이 용트림하는 기와집들이 즐비하니

왕궁처럼 웅장한 이 마을, 아무개씨네 집성촌(集姓村)이 배출한 인걸은

두 손으로도 다 꼽을 수가 없다.

좌의정이 나고, 도승지와 판서가 수두룩하니 참판은 명함도 못 내밀 처지다.

지금도 왕궁엔 이 권세마을 출신들이 서로 이끌고 밀며 권력의 한축을 이룬다.

고을 사또가 부임하면 맨 먼저 이 권세마을로 달려와 어른들에게

무릎이 까질 정도로 인사를 했다.

글 읽는 소리, 헛기침 소리뿐인 이 양반동네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동구 밖 나루터에 주막이 생기고부터다.

도저히 주막이 들어설 자리가 아닌 곳에 주막이 들어앉았다.

주막이란 오가는 사람이 많은 길목에 자리 잡는 법인데,

이곳 나루터는 오직 100여호가 사는 권세마을 사람들만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칠일 장날에 십리 밖 저잣거리로 가는데 한가롭게

이 나루터에서 술 마실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막집 자체도 볼품이 없었다.

어부가 살다 버리고 간 초가삼간에 엉덩이 겨우 붙일 툇마루와 부엌이 전부다.

권세마을 양반들이 가끔씩 들락거렸다.

이 주막집의 장사방법은 독특하다.

워낙 좁은 집이라 서너명만 와도 툇마루에 걸터앉아

선술집처럼 대포잔을 제낄 수밖에 없지만 혼자 오는 손님은

정중히 방으로 모셔 술상을 차리고 사립문을 잠가버리는 것이다.

두리번거리며 혼자 오는 손님이 늘어난 것은

제대로 안방에 앉아 술상을 받겠다는 뜻보다 주모와 수작을

한번 걸어보겠다는 흉계가 깔려 있었다.

스물여섯, 일곱쯤 보이는 주모는 얼굴에 수심이 살짝 깔렸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한 고운 얼굴에 기품이 있었다.

이곳저곳 색주집을 떠돌아다니던 삼패 기생이나 들병이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소쩍새가 우는 봄날 밤에 아무개 대감의 장손자가 주모와 단둘이 대작을 하다가

주모를 쓰러뜨렸다. 주모의 저항은 크지 않았다.

옷매무새를 고치며 “도련님을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술장사를 하지만 제 몸을 함부로 돌리지 않습니다.

오늘 일을 소문내시면 쇤네는 이 은장도로 숨을 끊겠습니다.”

대감의 장손자는 감격했다.

스산한 가을바람이 불 때 주막은 문을 닫고 주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후로 주모를 봤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대감의 장손자가 의원을 찾았다.

“몇 달 전 귀두에 아무 감각도 없는 사마귀 같은 게 몇 개 나더니

이젠 진물이 나고 입속도 헐고 손발도….”

의원은 보더니 “매독(梅毒)이오.”
그런데 매독 걸린 사람은 대감의 장손자뿐만이 아니다.

권세마을 모든 남정네가 걸렸고, 그 부인들도 다 걸렸다.

청미래덩굴의 뿌리를 삶아 먹는다, 수은환을 먹는다,

청산가리 연고를 바른다 별짓을 다해도 낫는 사람이 없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코가 내려앉고 내장이 녹아 내리고 미친 사람이 나타나고….

그뿐인가 기형아가 태어나기 시작했다.

사또의 명을 받아 의원이 역학조사를 해보니 권세마을 양반님들 하나같이

주막집 주모와 살을 섞었다.

의원은 판서댁 늙은 행랑아범으로부터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21년 전 그해 겨울, 아무개 승지댁 집사가 서찰을 가지고

한양에 다녀왔더니 마누라가 목을 매 숨져 거적때기로 덮여 있었다.

눈이 뒤집힌 집사가 낫을 들고 승지댁 둘째아들을 찾아 나서자

한통속 마을 일가 친척들은 도리어 집사를 묶어 사형(私刑)을 가했다.

집사도 죽었다.

일곱살 난 딸이 거지가 되어 이집 저집 굴뚝을 안고 그해 겨울을 나더니

이듬해 봄, 어디론가 사라졌다. 행랑아범이 말했다.
“나루터 주모를 한번 봤구먼요. 그 아이가 틀림없어요.”
의원이 하늘을 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