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글

첫사랑에 진 빚 (김화순)

우현 띵호와 2022. 4. 25. 01:02

첫사랑에 진 빚 (김화순)

남편이 없는 집에서 며칠을 홀로 지내다 보니

지난 60년 세월이 활동사진처럼 펼쳐져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내 살아온 발자취 중 몇 군데를 영원히 지워

기억하지 못했으면 하는 바람이 들기도 했다.

우리가 부부의 연을 맺은 세월이 30년은 지났지만,

사랑하며 산 세월은 아마 60년도 넘었을 것 같다.

그러니 4박 5일의 독수공방은 힘들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나간 잡생각으로 뒤엉켜 뒤척이게 하고 있었다.

해외여행을 떠나면서 남편은 내 두 손을 꼭 쥐고 말했다.

“사실 당신을 두고 나 혼자 여행을 떠나기는 싫지만 어쩌겠어.

예전 직장 동료들과 만든 모임인데 나만 빠질 수는 없잖아?”

 

남편의 교장승진 동기 모임이었으니

사실은 내가 낄 자리가 아니었다.

남편은 미안해하면서 해외여행을 떠났는데도

시시때때로 전화로 안부를 물으니 여간 고마운 게 아니었다.

그런 자상한 남편에 나는 평생 너무 큰 빚을 지고 살기에

온몸이 오싹거릴 때가 있다.

그렇다고 남편이 그 빚을 갚으라 하지도 않고,

심지어 빚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평생 빚으로 생각하며 살아왔고

갚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오늘도 자리에 누우니 지난 세월의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하더니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다가왔다.

“얼레리 꼴레리. 얼레리 꼴레리. 준영이하고 화순이는

서로서로 좋아하고 사랑한대요.”

 

초등학교 3학년 때였을 것이다.

학교에서 같은 반 아이들은 우리 둘을 놀리며

저희끼리 만든 가사에 리듬과 가락을 붙여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애들을 쫓아다니며 바락바락 악을 썼지만,

준영이는 달랐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들은 척, 못 들은 척

자기 일만 묵묵히 하는 남자였다.

화장실을 변소라 부르던 시대, 장난꾸러기 아이들은

학교 변소의 벽에다 분필로 낙서까지 했다.

우리 둘을 연결한 내용으로 노래 가사와 같았으니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누가 변소에 이런 낙서를 한 거야?

이준영, 당장 낙서한 놈을 찾아와. 찾지 못하면

이 변소의 낙서는 너하고 화순이가 지워야 한다.”

선생님의 엄명에도 준영이는 변소에

누가 낙서를 했는지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냥 자신이 냄새나는 변소를 청소하면서 묵묵히 낙서를 지웠다.

“준영아, 내가 도와줄게.

선생님께서 너하고 나랑 둘이서 지우라고 했잖아.”

내가 변소 청소를 돕겠다고 달려들었더니

준영이는 안 된다고 뿌리쳤다.

 

“야, 여자가 이런 냄새나는 변소에 들어와 청소하면 되겠냐?

이런 궂은일은 남자가 해야 하는 거야.”

어릴 때부터 그런 준영이가 믿음직스러웠기에

내가 따랐지만 3학년 때의 그 날은 정말 내 마음을

완전히 빼앗기고 말았다.

 

우리는 학교가 있는 면 소재지에서 4km나 떨어진

산 아래 조그만 동네에 살았다.

그러니 학교에 갈 때건, 집으로 돌아올 때건,

우리 둘은 같이 붙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

우리 동네는 전부 합쳐봐야 20호가량 되는 자연부락인데

모두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러니 동네 사람은 모두가 가족과 같았다.

맛있는 음식을 하면 서로 집으로 불러 같이 먹고,

즐겁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같이 나누었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준영이와 나는 한 동네서

남매처럼 살았으니 그와 나는 실과 바늘이었다.

그러니 우리 반 아이들의 놀림은 어쩌면 당연했을 것이다.

 

“준영아! 우리 화순이 좀 잘 데리고 다녀라.

애들이 때리면 좀 말려주고…….”

처음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을 때

어린 것들을 4km나 떨어진 면 소재지 학교까지 보내야 했으니

우리 엄마는 준영이한테 나를 부탁하곤 했다.

준영이도 나와 똑같은 1학년인데도 나보다 키가 컸고

의젓했기에 우리 어머니가 그런 부탁을 했을 것이다.

우리 둘은 학교에 오고 집에 갈 때마다 붙어 다녔다.

그러니 개구쟁이 학급 애들의 눈에 이상하게 보여

놀림감이 된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공부 잘하는 애들은

남들의 놀림에 흥분하여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으니

준영이가 바로 그런 애였다.

 

그러니 어릴 때부터 준영이는 내 가슴에 콕 박혀 떠나질 않았다.

조선 시대 서해안의 군사적 거점이었고

천주교 박해의 중심지였던 서산의 해미면은

그 옛날 면 소재지이면서도 남녀공학인 고등학교까지 있었다.

그런 면 소재지에서 우리 둘은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을 왕복하며 똑같이 학교 교육을 받았다.

그 12년 동안 학교와 집을 오가며 우리는 정이 들대로 들어있었다.

준영이 눈에는 다른 여자가 보이지 않았고,

내 가슴에는 다른 남자가 자리하지 못했다.

머리가 컸던 고 3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며 내가 준영이에 물었다.

“갈 대학은 결정했어?”

내 물음에 준영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정형편이 어려우니 2년제 교육대학에 진학해

초등학교 교사를 해야 할 것 같아.”

당시의 2년제 교육대학에 진학하겠다는 준영이의 대답에

나는 가슴이 쿵쿵 뛰었다.

나는 고3을 끝으로 공부를 접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동생들도 줄줄이 있는데 계집애를 고등학교까지 가르쳐 주었으면 됐지,

더는 못 가르쳐 준다.

그러니 취직을 하든지 아니면 집에서 살림을 배우다가 시집이나 가거라.”

부모님의 이런 결정은 결국 나를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뜨렸고

지금까지 가슴에 멍울로 남아있다.

“화순이 너도 나와 같이 대학에 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대화를 끝으로 우리는 제 갈 길을 가게 되었다.

해가 바뀌자 켜켜이 쌓였던 12년의 첫사랑은 내 곁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렇다고 그동안 우리가 서로의 옆구리를 찌르며

손가락을 걸고 사랑을 맹세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서로가 서로에 호감을 느띠고

마음속 깊게 서로를 품고만 있었다.

준영이는 공주교육대학으로 나는 서울의 조그만 회사로

흩어지다 보니 품었던 감정의 빛도 서서히 바라기 시작했다.

명절 때 고향에 들렀을 때 만나면 예전과 달리 그리 어색할 수가 없었다.

순간 어떤 심리학자의 말이 생각났다.

 

‘죽도록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도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면 사랑이 쉽게 식는다.’

그래서 그런지 부부간에 싸움을 했어도 각방을 쓴다는 것은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기에 모두가 조심하는지도 모른다.

나도 준영이도 12년간 같이 붙어 다니다가

2년이란 세월은 눈 깜짝할 사이 지났고

준영이는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이 나 어느 바닷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는 예전처럼 준영이를 마음 놓고 만날 수도 없었다.

예전 철없던 시절에는 누구도 우리의 만남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그냥 동네 애들끼리구나 하고 생각 없이 보아 넘겼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혼기가 찬 우리들의 만남은 결국 소문으로 이어졌고

양쪽 집에서 동네 혼인은 안 된다며 난리가 난 것이다.

화순이 그년이 예전부터 반반한 얼굴을 가지고 꼬리를 쳤지.

그러니 우리 준영이가 넘어간 거야.

그리고 우리 준영이는 대학을 나왔는데 제까짓 것이 감히…….”

준영이 어머니는 온 동네 사람에 이 말 저 말을 싸 들고 다니며 펼쳐놓았다.

“옛날부터 아비 없는 자식한테는 딸도 안 준다고 했어.”

우리 어머니는 준영이 어머니의 가장 아픈 부분을 후벼 팠다.

어려서부터 그리 믿음직스럽게 여겼던 준영이는

나 때문에 어느새 나쁜 애로 변해 있었다.

준영이 엄마가 한마디 하면 우리 엄마는 두 마디를 했으니

점점 두 집 간 사이는 벌어지고 있었다.

거기다가 우리 둘 때문에 스무 가구의 동네 사람이

두 편으로 쪼개지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마저도 자기 일이 아니라고 있는 말,

없는 말로 우리 둘을 까불렀으니 이제는 감당하기조차 어려웠다.

고향에서 떠도는 말을 뒤로하고 서울로 돌아온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래, 어차피 이루어지지 않을 거 내가 먼저 시집을 가자.

그러면 준영이도 편해질 거야.”

 

어떤 행동이든지 내가 먼저 실행에 옮겨야 준영이가 편할 것 같았다.

또 부모님들끼리도 서로 반목하지 않고

동네 사람들도 두 패로 갈리지 않을 것 같았다.

거기다가 내가 준영이의 여자가 되기에는

한참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를 놓아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런 결론을 얻자 나는 회사 동료로 내게 관심을 보였던 사람과

급속도로 친해졌다. 그리고 첫사랑을 잊고 싶은 마음에

눈 딱 감고 그와 결혼을 했다.

그런데 일을 급하게 하는 사람은 꼭 일을 그르쳐

두 번 일한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결혼을 하고 보니 남자가 상습 도박꾼으로 수 없는 빚을 지고 있었다.

너무 놀라 어찌할 줄 모르다가도 그를 개과 시켜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싶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노름에 미친 사람은 다시는 안 하겠다고 손가락을 자르고서도

나중에 화투를 발가락에 끼우고 한다더라.”

결국 나는 그 남자와 모든 걸 접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고향에도 내려가지 않고 서울에서 혼자 살며 회사만 다녔다.

비록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조그만 회사에서 받는 월급으로도

그럭저럭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기에 행복했다.

 

세월이 흘러 내 동생들도 줄줄이 결혼했고

내 나이는 이미 서른다섯이 되었다.

70년대였으니 서른다섯이면 노총각에 노처녀 소리를 들었던 시대였다.

모처럼 명절을 맞아 한동안 잊었던 고향을 찾았다.

“누나, 준영이 형도 장가를 안 가고 있어.

그 집에서 걱정이 여간 아닌가 봐.”

가끔 동생한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으니

모든 게 내 책임인 것으로 느껴졌다.

준영이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청상이 된 어머니가 어렵게 키워낸 아들이다.

그런데 서른다섯이 되도록 아직도 장가를 안 갔다니

그의 마음을 빼앗은 내 책임처럼 생각됐다.

나는 모처럼 고향에서 추석을 맞아 들떠 있을 때

준영이한테 만나자는 기별이 왔다.

나는 어찌할까 여러 번 망설이다가 면 소재지 다방으로 나갔다.

“왔어? 서울 어디서 살아?”

겨우 그 말을 묻고 준영이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화순아, 나와 결혼하자.”

준영이가 느닷없이 뱉은 말에 나는 뜨거운 국물에 덴 듯 펄쩍 뛰었다.

“우리 엄마도 이제는 반쯤은 승낙하셨어.”

그러면서 준영이는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스물 대여섯에서부터 결혼을 시켜 빨리 대를 이으려 해도

준영이는 엄마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가 갈라선 후 이곳저곳에서 혼담이 들어올 때마다

준영이는 내가 아니면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어머니께 말했단다.

오로지 예전 첫사랑을 느꼈던 내가 아니면

결혼을 안 하고 혼자 산다고 했단다.

준영이 어머니께서 한 번 결혼했던 흠 있는 여자이니 안 된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준영이는 내 손을 꼭 잡았다.

판단을 잘못했던 지난 일은 생각하지 말자고 했다.

같이 살면서 다시 예전에 학교 다닐 때처럼 오순도순 지내자고 했다.

 

“뭔 소리냐? 나는 이미 시집갔다가 돌아온 버린 몸이야.”

“그깟 몸뚱이가 뭐 그리 중요한데?

우리 몸의 어떤 부위도 사리를 판단하는 머리와

사랑을 담을 수 있는 뜨거운 가슴보다 더 중요한 곳은 없어.

그러기에 너의 머리에는 아직도 내가 들어 있고,

네 가슴에 새겨진 첫사랑의 흔적은 평생 사라지지 않을 거야.”

 

사실 준영의 외침은 맞는 말이었다.

부모의 완강한 반대와 또 오르지 못할 나무이기에

한때 준영이를 포기도 했었다.

그러나 잘못된 선택을 한 후 돌아선 날부터

더 생각나는 사람은 바로 준영이였다.

 

이 세상에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는 것이 확실한 듯하다.

처음에는 그리 난리를 피웠던 두 집에서 아무 말이 없었다.

우리 집은 일단 흠이 있는 딸이니 말을 꺼낼 수조차 없었다.

준영이 엄마는 어떻게든 아들을 장가보내야 했으니

고까워도 말을 삼갔다.

거기다 동네 사람도 지난 일을 후회라도 하듯

더는 수군거리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우리의 혼사는 축복이었다.

“쯧쯧, 진즉 이루어졌어야 할 짝이었는데…….”

우여곡절을 거친 후 우리는 결혼을 했고 30년 넘게 살았다.

나는 결혼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남편에게 큰 빚을 지고 있었다.

그래서 평생 살면서 진 빚을 갚는다고 마음먹었으나

빚은 사채처럼 자꾸만 늘기 시작했다.

살아가면서 남편에게 받은 사랑이 너무 커 오히려 빚이

새끼에 새끼를 쳐 늘어난 것이다.

이제는 빚이 너무 늘고, 나이도 들어 도저히 갚을 여력이 없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그래도 가끔 첫사랑에 관해 이야기할 때

주변 사람들이 늘 하는 말이 있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그럴 때 우리 부부 서로 마주 보며 말한다.

“첫사랑은 한 쪽이 손해를 감수하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 말하면서도 내 가슴 한쪽이 늘 시리니

아마 아름다운 첫사랑에 진 빚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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