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지유(何陋之有)
어찌 누추한 곳이 있겠는가,
자신이 만족하며 사는 곳이 제일
[어찌 하(亻/5) 더러울 루(阝/6) 갈 지(丿/3) 있을 유(月/2)]
이사를 한 뒤 친구나 이웃들을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하며 집을 구경시킨다.
번거로운 것을 피하여 점차 옛 풍습이 되어갈
정도로 드물어졌지만 집들이를 할 때
주인은 화려한 집이라도 꼭 좁고 너저분하다며
陋屋(누옥)이라고 겸손해한다.
자기를 낮춘다고 하더라도
정도가 심하면 孔子(공자)님이 꾸짖을 것이다.
거처하는 사람의 인품에 따라 향기가 날 수 있다며
‘군자가 머무는 곳에 어찌 누추함이 있겠는가
(君子居之 何陋之有/ 군자거지 하루지유)’하고 말이다.
빈한한 생활에도 평안한 마음으로 도행하기를 즐거워하며
근심을 잊는 安貧樂道(안빈낙도)와 樂以忘憂(낙이망우)를
최고로 쳤던 선비들은 공자의 교훈으로
주어진 불편을 능히 이겨냈다.
누추한 곳이라도 능히 교화할 수 있다는 말은 ‘論語(논어)’의
子罕(자한)편에 등장한다.
공자가 당시 中原(중원)에는 성인의 도가 행해지지 않아
동방의 아홉 夷族(이족)이 사는 땅으로 옮겨 살려고 했다.
한 사람이 누추할 텐데 어찌 지내려 하느냐고 묻자
군자가 가서 교화해 살면 되니 무슨 누추함이 있겠느냐고 답했다.
唐(당)나라 시인 劉禹錫(유우석)은 ‘陋室銘(누실명)’에서
더 멋지게 표현한다.
‘산은 높음에 있지 않고 신선이 살아 명산이고
(山不在高 有仙則名/ 산부재고 유선즉명),
물은 깊어서가 아니라 용이 살아 영험하다
(水不在深 有龍則靈/ 수부재심 유룡즉령),
이 집은 누추하더라도 덕이 있어 향기롭다
(斯是陋室 唯吾德馨/ 사시누실 유오덕형).’
조선의 許筠(허균)도 ‘누실명’을 남겼다.
‘사람들은 누추한 곳에 어찌 사느냐고 묻지만
(人謂陋室 陋不可處/ 인위누실 누불가처),
내가 보기에는 맑은 신선의 세계란다
(我則視之 淸都玉府/ 아즉시지 청도옥부).’
군자가 산다면 누추한들 어떠리 하며 유유자적이다.
집들이가 사라지는 것은 형식적인 것을 꺼리는 풍조도 있겠지만
집 구하기가 어려운 것도 한 원인일 수 있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조그만 아파트가 수억대가 되니
젊은이가 봉급을 쓰지 않고 10년을 넘겨 모아도 감당을 못한단다.
이런 판이라 아무리 깨끗한 마음으로 살려고 해도 기본 환경이
조성될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