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15)운명의 윷을 던지다

우현 띵호와 2021. 9. 18. 02:22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15)운명의 윷을 던지다

가난한 집안의 셋째딸 언년이
김대감집 딸 몸종으로 들어가
결혼하자고 협박하는 산적두목에
아씨를 대신해 시집 가게 되는데…

강원 강릉에 딸 일곱, 아들 하나를 둔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셋째 딸 언년이는 입 하나 덜겠다고 열두살 때 김 대감 댁 몸종으로 들어갔다.

귀염상에 눈치 빠른 언년이는 두살 위인 김 대감 외동딸의 몸종이 되어

입속의 혀처럼 아씨를 받들었다.

네해가 지나 아씨가 한양의 홍 판서 아들에게 시집을 가자

언년이도 몸종으로 따라갔다.

이듬해 친정 생각으로 아씨가 눈물을 보이자 신랑은 말을 타고

아씨는 가마를 타고 신행길에 올랐다.

말고삐를 잡고 등짐을 지고 걸어가는 하인들 틈에서

언년이의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걷는 것만 같았다.

몇 날 며칠을 걸어 오대산 허리를 돌아

진부 주막집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저녁상을 물리고 이부자리를 펴는데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떠들썩하더니

아씨 방의 방문이 쾅 열리고 건장한 남자가 들어와

새신랑에게 넙죽 큰절을 올리는 게 아닌가.

아씨는 장옷을 덮어쓰고 방구석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데

이 무례한 남자가 걸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오대산 산적두목입니다. 부하가 삼백이고 산채는 철옹성이오.

창고엔 금은보화가 가득하지만 내 나이 삼십이 다 되도록 장가를 못 갔소.

세상에 널린 게 여자라지만 맘에 드는 색싯감이 한사람도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찾았소. 바로 선비의 신부요.”

새신랑이 고함쳤다.

“이 무슨 해괴한 수작이오. 썩 물러나시오.”

산적두목은 아랑곳 않고 으름장을 놓았다.

“색시를 내주지 않으면 선비의 목숨도 온전치 못할 것이오.

새벽 닭이 울기 전에 떠나려 하니 번잡스럽게 일 벌이지 말고

여기 삼천냥으로 좋은 색시를 다시 구하시오.”
“세상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제가 고향 생각에 눈물을 보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씨는 새신랑을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때 언년이가 살며시 들어왔다.

언년이는 새신랑을 떼어 놓고 아씨와 이마를 맞대더니

이불을 뒤집어쓰고 나지막이 말했다.

“아씨, 걱정 마십시오. 제가 대신 가겠습니다요.”

언년이는 말을 이었다.

“오늘 저희의 행차를 산적두목은 먼발치 숲속에서 봤을 겁니다.

아씨의 이목구비를 보지는 못했을 거고 제 얼굴도 자세히 못 봤을 거구먼요.”

아씨는 언년이의 살신성인에 감격하여 그녀를 안고 눈물을 쏟았다.

하지만 언년이의 속내는 조금 달랐다.

언년이가 그렇게 한 것은 아씨를 살리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방년 열일곱, 혼기가 닥쳤는데 몸종 주제에 만나게 될

신랑이라 해 봐야 머슴이나 어느 집 종일 게 뻔한 일이라

비록 산적이지만 한 무리의 부하를 거느린 두목에,

허우대도 멀쩡한 호남한테 시집가고픈 생각이 치밀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윷을 던진 것이다.

언년이는 아씨와 옷을 바꿔 입고 장옷을 덮어썼다.

“떠날 시간이오. 빨리 나오시오!” 밖에서 산적들이 소리쳤다.

방에서는 울음소리가 크게 터졌다.

“여보, 소첩을 잊고 좋은 규수 얻어서…. 으흐흐흑.”

“여보….” 아씨(?)는 장옷을 덮어쓴 채 문을 열고 나가

뒤돌아보며 가마에 올랐다. 산적 떼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씨와 새신랑은 날이 새자 대관령을 넘어 강릉에 무사히 당도하여

언년이 집으로 갔다. 언년이 가족에게 산적두목이 준 삼천냥을 건네줬다.

몇 년 후 한양 홍 판서 집에 언년이가 찾아와 아씨와 부둥켜안았다.

그간 아씨의 남편은 급제했고 아씨는 일남일녀를 낳았다.

언년이는 산채에서 아들 둘을 낳았다.

무과에 급제했지만 서자라는 이유로 임관되지 않아

산적이 된 언년이 남편은 아씨의 시아버지인 홍 판서의 힘으로

모두가 발령받기 싫어하는 함경도 끝자락 무산에서 우영장이 돼

국경을 지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