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49) - 처녀 뱃사공

우현 띵호와 2021. 9. 24. 22:55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49) - 처녀 뱃사공 

나루터에 나타난 저잣거리 왈패 셋…처녀뱃사공 청명을 희롱하고
숲으로 끌고 가는데…주위 사람들 모두 모른척
왜소한 방물장수 청년만이…고함을 지르며 쫓아갔는데… 

뱃사공 아버지가 이승을 하직하자 노를 잡아 처녀 뱃사공이 된

열일곱살 청명은 혈혈단신이 되었지만 외롭지는 않았다.

황참봉네 집사로 일하는 총각 태묵이와 눈이 맞은 것이다.

황참봉네 논밭은 월곡천 건너에 산재해 있어 가을이면 집사인 태묵이가

작황을 보고 소작료를 책정키 위해 매일 청명의 배를 탔다.

어느 가을날, 마지막 배로 강을 건너고 나루터에 배를 묶는데

내 건너에서 태묵이가 소리쳤다.

후두둑 찬비가 내리고 날은 어두워지는데 청명이는 배를 풀어 내를 건너

태묵이를 태워 왔다. 가을비가 사납게 쏟아져 태묵은 고개 너머

황참봉네 집까지 갈 수 없어 나루터 옆 청명이네 집에 들어갔다.

감자를 박아넣은 보리밥으로 저녁을 때우고 호롱불을 마주 보고

벽에 기대앉아 서로 살아온 얘기를 하며 목이 메어 천장을 쳐다보다가

한숨을 쉬다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태묵이는 조실부모하고 부지런함으로 황참봉의 눈에 들어

집사가 되기까지 온갖 고생을 다했다. 얘기에 정신이 팔려

동창이 밝아오는 것도 몰랐다. 청명이와 두 살 위 태묵이는 정이 깊어갔다.

어느 날 저녁 태묵이는 청명의 손가락에 은반지를 끼워주고 갔다.

기나긴 겨울밤, 태묵이는 불쑥 찾아와 약과와 인절미를 주고 돌아가기도 했다.

꽃 피는 봄, 청명이의 자색도 꽃처럼 피어났다.

밤새 봄비가 쏟아지더니 날이 밝자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

하늘은 구름 한 점 없고 산벚꽃은 흐드러지고 꾀꼬리 울음에 맞춰

산들바람은 목덜미를 감아 돌았다.

나룻배에 자리 잡은 사람들이 배 떠나기 전에 얘기꽃을 피웠다.

씨름판에서 몰고 온 황소가 다섯 마리라느니,

그 말을 들은 어깨가 떡 벌어진 장정은 쌀 세 가마를 지고

십리를 단숨에 갈 수 있다느니,

어떤 젊은이는 밭에 박힌 집채만한 바위를 뽑았다고 힘자랑을 했다.

배가 막 떠나려는데 젊은이 셋이 달려왔다. 저잣거리의 왈패들이다.

하나는 사또의 생질이라고 세상 무서운 게 없고,

하나는 만석꾼 부잣집 막내아들 개차반이고,

나머지 하나는 언제나 품속에 단검을 품고 다니며

싸움판에서 뼈가 굵어진 망나니다.

사또의 생질이 밤새 술을 마셨는지 술냄새를 풍기며

청명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움켜잡자 놀란 그녀가 홱 돌아서며 뺨을 갈겼다.

“이년 봐라” 하면서 배에서 내리자 나머지 두 왈패가

청명의 두 팔을 잡고 배에서 끌어내려 사또 생질을 따라 숲으로 들어갔다.

청명이 두 다리를 버둥거리며 배를 향해 “사람 살려―”

목에서 피를 쏟듯 소리쳐도 씨름꾼도, 쌀 세 가마 졌다는 장수도,

바위를 뽑았다는 젊은이도, 물푸레 지팡이를 든 스님·보부상·소 장수·선비·

소금 장수도 모두 고개를 돌려 먼 산만 바라봤다.

그때 왜소한 방물장수 청년이 배에서 뛰어내려 숲 속으로 달려가며

“이 천하에 몹쓸 놈들아~” 벼락 고함을 질렀다.

청명의 하늘을 찢는 비명도 곧 잠잠해지고 꾀꼬리 소리만 들렸다.

얼마 후 왈패 셋이 싱글거리며 숲에서 나와 훌쩍 배에 오르고,

치마가 찢어지고 옷고름이 풀어헤쳐진 데다 머리까지 산발이 된 청명이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뒤따라 배에 올랐다.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방물장수가 숲을 나와 기어서 배로 다가오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청명이 방물고리짝을 배에서 냇가로 내던지며 닻줄을 풀고 노를 밀었다.

방물장수가 “배를 멈춰” 고함치자 뱃사공 청명이

“배 떠날 시간이 지났소” 매몰차게 말했다.

입술이 당나발이 된 방물장수가 “야 이년아, 이럴 수가 있어”

냇가에서 자갈을 던졌지만 떠난 배는 오지 않았다.

간밤에 퍼부은 비로 월곡천은 으르렁거리며 세차게 흘러내렸다.

보통 땐 강 한복판에 칼바위가 드러나 보이지만 오늘은 물살 속에 잠겨 버렸다.

강 위로 오른 나룻배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물살을 타고

쏜살같이 내려가 칼바위를 박고 산산조각이 났다.

살아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