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50) 장맛비

우현 띵호와 2021. 9. 24. 22:56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50) 장맛비

똑소리 나는 이초시의 외동딸 ‘득순’
신랑 될 ‘구식’이 공부하는 절 찾았다
집에오는 길 비 쏟아져 다시 돌아가
첫날밤 치른 득순, 뭔가 허망한데…

이초시의 외동딸 득순이를 동네 사람들은 똑순이라 불렀다.

“아지매, 콩 한되 주이소.” “와?” “아제가 우리 소를 한나절 부려먹더니

소가 힘이 쪽 빠져갖고 소죽솥에 콩 한되 넣어줘야 되겠심더.”

일곱살 똑순이는 부모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기어이 콩 한되를 받아와서

소죽솥에 넣었다.

똑순이는 동네 서당에 다니는 유일한 여자아이지만 남자 학동들 다 합쳐도

똑순이 하나만 못했다. “모두 불알 떼서 누렁이 줘 버리거라.” 훈장님이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다.

김구식이가 그나마 훈장님한테 회초리를 덜 맞는 편이지만 똑순이가

<사서삼경> 들어갈 때 그는 아직 <명심보감>에 매달려 있다.

구식이와 똑순이는 유별난 사이다.

구식이 아버지 김진사와 똑순이 아버지 이초시는 둘도없는 친구로,

그들은 때가 되면 사돈을 맺기로 약속했다.

춘하추동이 돌고 똑순이 열여섯이 되자 가슴이 부풀고 엉덩이는 벌어져

색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구식이는 책보따리를 싸들고 삼십리 밖 절로 들어갔다.

구식이 과거에 붙기를 바라는 마음은 똑순이보다도 그녀의 아버지

이초시가 더하다. 과거에 여덟번이나 떨어지고 시험을 포기하고 나서는

아들이 없어 사위 될 사람에게 그의 꿈을 씌운 것이다.

똑순이는 고운 안동포저고리를 지어서 구식이가 있는 절로 갔다.

구식이와 정담을 나누다가 똑순이는 절 아래 한참까지 따라 내려온

구식이를 돌려보내고 혼자 집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더니

디딤돌이 잠겨 개울을 건널 수가 없었다.

비는 그치지 않고 개울물은 더 불어나 절로 되돌아와 흠뻑 젖은 옷을 벗어

말리고 구식이 옷을 홑으로 걸쳐 입었다.

그날 밤 똑순이는 구식이 품에 안겼다. 첫날밤을 절간방에서 치렀다.

언제 비가 쏟아졌느냐는 듯 쾌청한 이튿날 새벽 똑순이는 절간을 내려왔다.

고개를 넘다가 소나무 밑에 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신랑각시 운우의 정이 원래 허망한 것인가. 구식이 머리로 과거에 붙을까….

나는 왜 어젯밤 구식이와 합궁을 했을 때 창국이가 떠올랐을까?”

창국이는 똑순이네집 집사이자 머슴, 행랑아범 역할까지 하는

두살 위 총각이다. 조실부모하고 집안이 망해 오갈 데 없게 되자

누이 시댁 쪽 친척인 이초시가 데려다 키웠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는데 작년 여름, 밭을 매러 간 창국이에게

점심 보따리를 이고 간 똑순이가 깜짝 놀랐다.

개울에서 벌거벗고 멱을 감는 창국이를 나무 뒤에서 걸음을 멈추고

정신없이 내려다봤다. 떡 벌어진 가슴에 우람한 남근,

그것이 왜 어젯밤 신랑 될 사람과 합궁을 하는데 나타난 것인가.

어느 비 오는 날 밤, 똑순이는 행랑채로 스며들어 소스라치게 놀라는

창국이의 입을 막았다. 구식이와는 너무나 달랐다.

구들장이 꺼질 듯이, 폭풍이 몰아치듯이 격렬했다.

똑순이의 신음은 장맛비, 낙수 소리까지 눌렀다.

별당으로 돌아온 똑순이는 몸은 노곤했지만 마음은 구름 위를 걸었다.

“창국이 오빠가 서당공부를 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 많은 우리 집 농토와

소작농과 소출 곡식을 줄줄 외는 걸 보면 보통 머리가 아니다.

당대는 포기하고 다음 대를 보는 거야!”

장맛비가 퍼붓기만 하면 똑순이는 행랑방으로 스며들었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똑순이가 창국을 타고 있는데 와장창 문

고리가 뽑히며 이초시가 낫을 치켜들고 뛰어들어왔다.

옷을 추슬러 걸친 창국은 방구석에서 떨고 있는데 똑순이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아버지, 제 얘기 들으시고 제 목을 치세요.” 숨을 가다듬은 똑순이 둘러댔다.

“꿈속에 황룡이 제 치마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꿈을 꾸고 잉태한 자식은 알성급제를 해서

천하를 호령한다는 걸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이 밤중에 삼십리 밖 절까지 갈 수도 없잖아요.”
18년 후 이초시 외손자는 어사화를 쓰고 금의환향해

고을사또가 마중을 나가고 잔치판이 사흘이나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