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55)담판

우현 띵호와 2021. 9. 24. 22:57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55)담판

마음 씀씀이가 후덕하지만
자식이 없던 선주 이초시 집에
식솔 딸린 선장 진백이 함께 사는데

조기잡이철 바다에 나갔던 진백이…

선대로부터 가업을 물려받은 이초시는 점잖은 선주다.
다섯척의 황포 돛배가 만선이 되어 돌아올 때면

소와 돼지를 잡고 술을 독으로 날라 선원들에게 잔치판을 벌여준다.

이초시는 마음 씀씀이가 후덕해 노련한 뱃사람들이 그의 밑으로 모여들었다.

제물포에 있는 드넓은 이초시집은 항상 사람들로 들끓었다.

별채가 여럿 있어 총각선원들도 살고,

식솔이 딸린 선장도 한울타리 안에서 살고 있다.

세살, 다섯살, 일곱살 아들 셋을 둔 용왕호 선장 진백이도 별채에 삼년째 살고 있다.

이초시는 동년배 진백을 워낙 신임해 집사노릇까지 맡겼다.

이초시 부인도 사람이 좋아 선원들을 한 식구처럼 챙겼다.

인물 좋고 가문 좋고 재산 많고 인품 좋은 이초시 부부에게

모자라는 한가지는 자식이 없다는 것이다.

이초시는 부인을 끔찍이 사랑해 가끔씩 도매상들에게 이끌려 기생집을 가도

외박하는 법이 없다.

이초시 부인은 항상 미소를 머금지만 위엄을 잃지 않고

그 큰 집안 살림을 빈틈없이 꾸려간다.

바깥출입도 없는 이초시 부인의 유일한 낙은 진백의 아들 셋을 데리고 노는 것이다.

진백의 부인도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인데다 다소곳하면서도

음식솜씨가 좋아 이초시 부인을 도와 부엌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조기잡이철이 됐다.

진백은 용왕호의 닻을 올려 만선의 꿈을 안고 연평도로 향했다.

연평도에 본거지를 잡고 산동반도 쪽으로 조기떼를 쫓아갈 때

갑자기 서쪽바다 끝에서 먹구름이 몰려오고 슬슬 심상찮은 바람이 일더니 곧

이어 집채같은 파도가 배를 덮쳤다.

그날 이후 용왕호를 본 사람도, 진백이와 선원들을 본 사람도 없었다.

소식을 전해들은 제물포 이초시네 집은 초상집이 됐다.

진백의 부인은 어린 삼형제를 안고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슬픔은 전염돼 이초시는 술과 한숨으로 나날을 보내고

이초시 부인도 눈이 퉁퉁 부었다.

용왕호를 삼킨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하고 춘하추동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다.

5년이 흐른 어느 봄날, 이초시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용왕호 선장 진백이 돌아온 것이다.

진백이 몸서리치는 기억들을 털어놓았다.

배가 난파돼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보니 부러진 돛을 안고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었다. 운좋게 강진을 떠나 산동반도로 가던 중국배가

그를 건져올렸으나 위해에서 인신매매단에 팔아넘겨버렸다.

파란만장한 중국에서의 노예생활 끝에 탈출해 꽁꽁 언 압록강을 건너

제물포까지 돌아왔을 땐 5년이 흐른 봄날이었다.

기가 막힐 일은 이초시 집에서 또 벌어졌다.

진백의 부인은 아이들을 다섯이나 데리고 있었다.

아들 넷, 딸 하나. 위로 아들 셋은 진백의 핏줄이요,

아래로 둘은 이초시의 씨다. 진백의 부인은 차림새부터 달라졌다.

귀부인이 돼 이초시네 안방을 차지한 것이다. 눈물만 흘렀다.

이초시네 사랑방에 어른거리는 촛불 아래 졸졸졸 술 따르는 소리만 들릴 뿐

끝없이 정적이 흘렀다.

“일이 이렇게 될 줄 나도 몰랐네.” 이초시가 입을 열었지만 진백은 묵묵부답이다.

또다시 정적이 흐르다가 입을 연 사람은 이초시다.

“지금부터 7년 전 시월 열이틀, 자네 부인은 친정어머니 병환을 돌보러

친정에 갔고 나는 보름 동안 연평도에 갔댔지.”

진백이 술잔을 떨어뜨리며 눈을 왕방울만하게 뜨고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내 처는 열흘 넘게 자네 씨를 받았지만 결국 석녀라는 게 증명됐네.”

이초시와 진백의 담판은 간단하게 끝났다.
진백과 아들 셋은 이초시가 마련해준 가마를 타고 한양으로 갔다.

종로통에 큰 포목점을 하는 이초시 부인이 버선발로 달려나와 그들을 반겼다.

포목점 뒤에 딸린 큰 기와집에서 그렇게도 귀여워하던 진백의 아들 셋을

아이들 방에 잠재우고 부엌에서 목욕을 한 이초시 부인이

술상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왔다.

보료에 앉은 진백에게 술 한잔을 올리고 큰절을 하며

“서방님” 말을 잇지 못하고 엎드려 어깨만 들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