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 김삿갓

방랑시인 김삿갓 (192) *전주(全州) 에서 ...

우현 띵호와 2021. 9. 30. 23:15

방랑시인 김삿갓 (192) *전주(全州) 에서 ...
비몽사몽간에 흔들어 깨우는 사람이 있어 눈을 떠보니,

머리맡에는 아까 만났던 김진사가 서 있었다.
너무도 뜻밖의 광경이어서 김삿갓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니, 이런 곳에 어떻게 오셨소 ? "
그러자 김진사는 용서를 비는 어조로,
"조금 전에 선비가 내 집 대문에 써놓은 시를 읽어 보고 찾아왔소이다.

요사이 거지 떼가 하도 많아 나는 귀공도 거지인 줄 알고 쫒아냈던 것이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으니 용서하시오."
김삿갓은 품고있던 분이 아직도 풀리지 않아,
"한번 쫒아 버렸으면 그만이지, 뭤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왔는냐 말요 ! "
하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김진사는 가볍게 웃으며 달래듯이 말했다.

"귀공이 나를 나무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오.

그러나 한 번 실수는 누구나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겠소.
내가 귀공에게 특별히 부탁하고 싶은 일도 있고 하니,

노여움을 풀고 어서 내 집으로 가십시다."

김삿갓은 생떼를 쓰는 것도 도리가 아닐 것 같아,

두말없이 김 진사를 따라 나섰다.

그리하여 김 진사 댁에서 오랫만에 저녁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저녁 식사 후에 들어 보니, 김 진사의 부탁이란 다른 것이 아니었다.

김 진사에게는 아홉 살짜리 손자가 하나 있어,

지금까지는 자기 자신이 직접 글을 가르쳐 왔었는데,

할아비가 손자에게 글을 가르쳐 준다는 것은 여러가지로 어려움이 많으니,

김삿갓에게 가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대문간에 아무렇게나 써 갈긴 한 수의 시가

생각지 못한 효과를 낸 셈이었다.

김삿갓은 호구지책으로 글을 팔아먹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당장 눈앞에 닥쳐오는 엄동설한만은 무사히 넘겨 놓고 봐야 하겠기에,

"좋소이다. 몇 달 동안 손자 아이에게 글을 배워 주도록 하지요.

그러나 봄이 되면 나는 어차피 길을 떠나야 할 사람이니,

그 점은 미리 양해해 주시오."

하고 김 진사의 부탁을 즉석에서 수락하였다.
그리하여 김삿갓은 그날부터는 밥 걱정도 없고, 잠도 편히 잘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 구석에서는,
(천하를 주유(周遊)해야 할 내가 밥 한 그릇에 팔려

초학 훈장으로 썩어나고 있으니,

나도 이제는 말로가 가까워 왔는가 보구나 ! )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기나긴 겨울이 가고 먼 산에 아지랑이 아물거리는 봄이 돌아오자,

김삿갓은 몸에 배여 있는 방랑벽이 야금야금 머리를 들고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한겨울을 꼬박 서당방에 앉아 보내다가 오랫만에
길을 나서니, 30리도 채 못가 다리가 무거워 오기 시작하였다.

따지고 보면 50 고개를 넘어선 지도 이미 여러 해가 되는지라,

다리가 약해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전에는 얼마든지 걸을 수 있었지만 갈빗대 사이에 담이 들었는지

이즈음은 매일 밤이면 옆구리가 결리기 시작 하였다.
(생로병사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 나에게도 죽을 날이 가까워 왔는가 보구나.)

걷는 것 조차, 힘에 겨웠던 김삿갓이 처량한 감회에 잠긴채

고갯길을 넘어가노라니, 길 양쪽 산속에는 가지가지 꽃들은

계절을 다투며 활짝 피어 있었다.

문득 그윽한 마음에 사로잡힌 김삿갓,

흥얼 거리며 언문(諺文) 시를 한 수 읊조리는데,

꽃잎 끝에 달려 있는 작은 이슬 방울들
빗줄기 이들을 찾아와서 어디로 데려 갈까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네가 알고 있나
무엇이 이 숲속에서 이들을 데려 갈까.
엄마 잃고 다리도 없는 가엾은 작은 새는
바람이 거세게 불어 오면 어디로 가야 하나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네가 알고 있나
무엇이 이 숲속에서 이들을 데려 갈까.

다리가 불편했던 김삿갓은 옥구를 떠난지 나흘이 지나서야

전주 고을에 들어섰다.

전주 고을의 진산(鎭山)은 건지산(乾止山)이다.

건지산은 듣던 바와 같이 수목이 울창하였다.

게다가 전주에서는 역사적으로 인물도 많이 났거니와

가옥도 고풍스러운 곳이 즐비하였다.

전주는 백제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요처(要處)인지라,

가는 곳마다 명승고적이 허다하였다.

남문 안에는 경기전을 비롯하여 고덕산(高德山)에 있는

만경대(萬景臺)와 모악산(母嶽山)에 있는 귀신사(歸信寺)와

보광사(普光寺) 등등, 고색창연한 사찰만도 여러 군데 있었다.

전주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하나의 명소는 라는 아름다운 인공 호수다.
전주는 얼른 보기에는 건지산을 비롯하여 고덕산, 모악산, 가련산(可連山)

등등 높고 낮은 몇 개의 산으로 둘러 쌓여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엄밀하게 조사해 보면, 건지산과 가련산은 서로 연결이 되어 있지 않아,
전주 서북방에 해당하는 그곳만은 산이 아닌 평야로만 되어 있다.
지관(地官)들은 그 점을 지적하여

는 풍수설을 오랜 옛날부터 강력히 고집해 왔었다.

이러한 지관들의 주장으로 후일 건지산과 가련산 사이에

높은 둑을 쌓아 올리는 동시에 둑 안에 있는 평야에 물을 가둬둠으로서

오늘날의 전주가 된 것이다.

이렇게 육지에 커다란 인공 호수가 만들어지고 보니, 주

변의 풍치를 아름답게 꾸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호숫가에 정자를 새로 지어 놓았는데,

그 정자가 바로 오늘날의 풍월정(風月亭)이다.

덕진호에 풍월정까지 만들어지자,

어떤 이름 모를 풍월객이 풍월정에 다음과 같은 풍월시를 한 수 써 걸어 놓았다.

깊은 늪 바라보니 푸른 하늘이 비치네
(一望深淵 映翠空 : 일망심연 영취공)

이 연못을 파는데 품이 얼마나 들었을까
(古來開鑿 幾人功 : 고래개착 기인공)

길게 뻗은 연기 속에 가을 달이 잠기고
(杖烟數里 籠秋月 : 장연수리 롱추월)

어부의 피리 소리에 늦바람 불어온다.
(漁笛一聲 橫晩風 : 어적일성 횡만풍)

전주 고을에 덕진호와 풍월정이라는 새로운 볼거리가 생기자

전국 각지에서 시인 묵객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때 부터는 전주 고을이 더욱 번창하게 되었고

는 풍설도 떠돌게 되었다.
중종때 영의정을 지낸, 유순(柳洵)은 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구경을 왔었다.
그리하여 덕진호에 걸려 있는 시의 운자를 따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걸기도 하였다.

맑고 깊은 연못 속에 하늘이 비치고
(一泓澄澈 映虛空 : 일홍징철 영허공)

덕을 쌓아 세상을 고르게 해 주도다
(蓄德仍收 濟物功 : 축덕잉수 제물공)

여기가 바로 용이 오른 곳이 아니라면
(是處眞龍 如不起 : 시처진용 여불기)

사람들은 어디서 번개를 보았으리오.
(世間何地 覓雷風 : 세간하지 멱뇌풍)

덕진호에서 정말로 용이 올랐는지 어쩐지, 그것은 누구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전주 고을이 갈수록 번창하는 것은

덕진호라는 인공 호수 덕택인 것은 확실하다고 김삿갓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 생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