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79) 천석꾼 천가지 걱정
민진사와 곡차 친구인 석근스님
천석꾼 부자에 경국지색 부인을 둔 그를 부러워하는데…
석근 스님과 민 진사는 곡차 친구다.
암자에서 나올 때 암자로 들어갈 때 석근 스님은 어김없이
민 진사 집에 들러 술잔을 따르며 고담준론을 나누고
시를 짓고 사군자를 쳤다.
허우대가 훤칠한 민 진사는 천석꾼 부자에 경국지색 부인을 둬
세상에 부러울 게 없지만 한가지 아쉬운 건 자식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석근 스님이 부러워죽겠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온 세상 사람들이 민 진사 어른을
가장 팔자 좋은 분이라 하는데.”
민 진사가 한숨을 길게 토하며
“천석꾼 천가지 걱정, 만석꾼 만가지 걱정이란 말 못 들어봤소?”
석근 스님이 컬컬 웃으며
“그건 배부른 부자들이 쫄쫄 굶는 사람들을
위로하려고 만들어낸 말이지요.”
술자리가 파해 암자로 올라가는 석근 스님 눈에는
비단치마에 가려졌어도 선명한 민 진사 부인의
수밀도 엉덩이 곡선이 아른거렸다.
“민 진사 그 양반, 무자식이 상팔자란 소리도 못 들어봤나.
곳간 꽉 찼지, 문전옥답이 한눈 가득하지,
밤이면 수밀도 부인을 껴안지, 싫증 나면 저잣거리에
살림 차린 첩집에 가지, 상다리가 휘어지게 산해진미를 먹지...
아이고, 같은 남자로 태어나 내 꼴이 이게 뭔가,
뒈질 놈의 나무아미타불….”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민 진사 부인이 대를 잇겠다고 백일기도를 시작한 곳은
석근 스님이 홀로 있는 청곡암이었다.
민 진사가 부인의 등을 떠밀어 청곡암으로 보냈다.
영검하게도 부인은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석근 스님은 두번 다시 민 진사 집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부인이 아들을 낳았다는 소문이 있고 얼마 후
민 진사가 아파 드러누웠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어느 날 민 진사네 시동이 석근 스님을 모시러 왔다.
일년여 만에 본 민 진사는 반쪽이 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석근 스님의 손을 잡고 말했다.
“우리 집을 부탁하오.” 그것이 유언이 되었다.
3년 후 탈상을 할 때 네살 난 상주는 의젓했고
청곡암 석근 스님은 머리를 길러 상투를 틀었다.
민 진사는 백골이 진토가 됐고 그의 사랑방엔
상투를 올리고 정자관을 쓴 석근이 정좌했다.
석근은 밤마다 그렇게도 그리던 수밀도 부인을 안았다.
네살 난 아들은 갈수록 석근을 닮아갔다.
석근은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자기 허벅지를 꼬집어봤다.
어느 날 밤 부인과 합환을 하고 곯아떨어졌는데
꿈에 민 진사가 “석근 스님, 곡차 한잔 합시다” 하며
호리병 을 들고 나타나 석근은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났다.
어느 날은 곳간 기왓장이 깨져 빗물이 스며들었지만
몇달이 지나서야 알게 되어 곡식이 반은 썩고 나락은 싹이 났다.
문전옥답 물꼬 싸움으로 노 참봉과 멱살잡이도 했다.
천연두에 걸린 아들이 얼굴을 긁을까봐 두손을 묶고
보름이나 곁을 지키며 잠을 못 잤더니 몸살이 나 자신이 드러누웠다.
부인 돈을 떼먹고 야반도주한 저잣거리 새우젓 장수를
잡으러 삼십리나 따라갔지만 결국 헛걸음했다.
안동포를 사두면 크게 오를 것이란 포목점 허 생원 말을 믿고
투자했다가 쫄딱 망하기도 했다.
열일곱살 찬모가 마당쇠하고 눈이 맞아 도망을 친 후에야
다락 속 전대가 없어진 걸 알았다.
부인이 뜨거운 물을 허벅지에 쏟아 화상을 입어
밤이면 사랑방에서 독수공방 신세가 되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났건만 크게 앓더니 소아마비가 되어
일어나지도 못했다.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3년이 흘렀다. 민 진사의 말이 떠올랐다.
청곡암 지붕엔 깨진 기와 사이로 잡초가 무성하고,
쪽마루는 썩어 여기저기 내려앉았고,
문풍지는 삭아서 바람에 날아갔다.
문에 박아놓았던 녹슨 대못을 뽑는 사람은 석근 스님이다.
정자관, 비단 마고자 다 벗어 던지고 빛 바랜 가사장삼에
머리를 박박 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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