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83)<홍매>

우현 띵호와 2021. 10. 5. 01:18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83)<홍매>

죽마고우 이초시와 한진사…붉은 매화 핀 날 사돈 맺어

이초시, 아들이 열병으로 세상 뜨자
청상과부 며느리 친정으로 보내는데…

이 초시와 한 진사는 죽마고우다.

어릴 적부터 같은 서당에 다니며 둘도 없는 단짝이 돼

말다툼 한번 없이 형제처럼 친하게 지냈다.

어른이 돼서도 두사람의 우정은 관포지교에 못지않았다.

장가를 가서 이 초시는 아들 둘을 두고,

한 진사는 아들 하나 딸 셋을 두었다.

어느 날 이 초시는 하인을 보내 강 건너 사는 한 진사를 불렀다.

한 진사가 이 초시네 하인에게 물었다.

“붉은 매화가 피었더냐?”
한 진사는 겨우내 잘 익은 감로주를 하인의 손에 들려 외나무다리를 건넜다.
이 초시 별채 앞에 서 있는 고매(古梅) 나무에

홍매화 꽃망울이 톡톡 터지기 시작했다.

두사람은 사랑방에 마주 앉아 문을 활짝 열고 달빛을

담뿍 머금은 홍매를 바라보며 홍매가 내뿜는 암향(暗香)을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술잔을 주고받았다.

홍매가 피었을 때 이 초시의 감로주 술안주는 어육(魚肉)이 아니고

오동통 살이 오른 고들빼기 초장무침이다.

이들은 삼경이 가깝도록 술을 마시다가 이 초시 맏아들과

한 진사의 둘째딸을 5년 후 바로 그날,

홍매가 폈을 때 혼례를 올리기로 약조했다.

그러고선 두친구는 일찌감치 서로 사돈이라고 불렀다.

5년이 후딱 흘러 이 초시 맏아들과 한 진사 둘째딸은

홍매화나무 아래서 혼례를 치렀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던가. 그해 여름,

새신랑은 열병에 걸려 약 한첩을 다 마시지 못하고 이승을 하직했다.

한 진사의 둘째딸은 졸지에 청상과부가 되어 별채에 갇힌 몸이 되었다.

그렇게 삼년상을 치르고 상복을 태웠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그해에도 어김없이 홍매가 피고 달빛은 내려앉았으며,

홍매의 그윽한 향기는 집 안을 감돌아 이 초시의 코끝을 스쳤다.

밤은 깊어 삼경인데, 이 초시는 심란함에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암향에 이끌려 마당으로 나왔다.

그런데 청상과부 며느리가 거처하는 별당에서 가느다란 불빛이

새어나오고 말소리도 들렸다.

이 초시는 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들창 밑에 다다랐다.
“서방님, 잠깐만 기다리세요. 치마를 벗고….”

이 초시는 머리가 쭈뼛 뻗쳤고 소름이 투두둑 솟아올랐다.

발돋움을 해서 한쪽 눈을 들창 구멍에 맞췄다.

청상과부 며느리가 벽에 죽은 남편의 화상을 걸어놓고

그 앞에서 속치마만 걸친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튿날, 이 초시는 강을 건너 한 진사 댁에 갔다.

술상을 놓고 마주 앉아 천장만 바라보던 이 초시가 적막을 깼다.
“자네 딸을 데려가게.”

“무슨 소린가? 내 딸은 자네 집 귀신이 된 건데 ….”
목소리가 높아졌다. “내 딸이 무슨 잘못이라도 했단 말인가?”

“잘못한 건 없네. 그냥 데려가게.”
한 진사가 술상을 엎었다.

“우리의 우정, 사돈 관계가 다 깨져도 좋단 말인가?”

“그래도 데려가게.”
이 초시는 문전옥답 스무 마지기를 팔아서 떠나는

며느리의 보따리에 넣어줬다. 춘하추동, 또 몇년이 흘렀다.

맏아들이 죽은 후 탐매(探梅)여행을 삼갔던 이 초시는

울적한 마음도 달랠 겸 선암사 홍매화를 맞이하기 위해 남도길로 들어섰다.

양지바른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담 밖으로 새빨간 매화 가지가 뻗은

주막집에 들렀다. 술꾼들과 주모가 왁자지껄 술판을 벌이고

있던 안방 문이 열리더니 다시 닫혔다.

잠시 후, 하녀가 나와 주막집 마당에서 홍매에 넋이 빠져 있는

이 초시를 객방으로 안내했다.

문을 열면 바로 홍매화 가지가 문지방에 닿을 듯한 방이다.

“이 홍매나무는 춘추(春秋)가 얼마나 되었는고?”
하녀가 대답하길 “동네 어귀 박 서방네 마당에 서 있던 것을

거름을 주고 이리로 옮겼습니다.”

달이 훤하게 뜬 그날 밤,

술상이 들어오는데 술은 감로주요,

안주는 고들빼기 초장무침이다.

이튿날 이 초시가 떠나며 하녀에게 유숙비를 계산하려 하자

한사코 받지 않았다. 오히려 버선 두 켤레를 이 초시 단봇짐에 넣어줬다.

주모와 이 초시는 한번도 얼굴을 마주치지 못했다.

이 초시가 고갯마루에서 버선을 신어 봤더니 발에 딱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