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38)삭발

우현 띵호와 2021. 10. 11. 00:00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38)삭발

어미 잃은 남아와 버려진 여아

젖동냥으로 키운 허공 스님

십여년 후 둘다 훌쩍자란 어느날…

다리를 건너던 허공 스님이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세웠다.

냇가 갈대숲에서 “으아~앙” 고고성이 들렸기 때문이다.

달려갔더니 남루한 차림의 여인이 혼절해 누워 있는데

갓난아기가 탯줄을 매단 채 바둥거리고 있었다.

“네 놈은 누구냐?” 실성한 산모는 몇 마디 중얼거리더니 눈을 감았다.

어미의 하혈에 새빨갛게 물든 아기를 안아 탯줄을 끊고 냇물에 씻기니

고추를 단 놈이 사지를 바둥거렸다.

죽은 산모를 산자락에 묻어주고 바랑망태에 애기를 넣고 동네로 가

젖 나오는 산모를 찾았다.

이튿날부터 이마을 저마을 다니며 젖동냥을 하는게 허공 스님의 일이 되었다.

3년이 흐른 어느 날 새벽, 아이 울음소리에 나가보니 암자밖 돌계단에

강보에 쌓인 아기가 울고 있는게 아닌가. 이리저리 둘러봐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 무슨 팔자인가.” 허공 스님은 긴 한숨을 토하며 아기를 안고 암자로 들어갔다.

강보를 열어보니 딸아이다.

네살 먹은 동자승 허암은 제 앞가림을 하고 가벼운 심부름도 해 허공 스님이

아기를 안고 동네에 젖동냥을 나갈 때 혼자서 암자를 지켰다.

춘하추동은 속절없이 암자를 거쳐가 어언 십여년이 흘렀다.

열다섯살 허암은 나무를 해오고 무너진 담도 고치고 궂은 일을 다했으며,

열두살 허연은 부엌일을 도맡았다.

허공 스님은 늙은 몸을 가누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암자 처마 밑 쪽마루에 앉아 봄 햇살을 쪼이고 있던 허공 스님이 빙그레 웃었다.

땀을 흘리며 나무 한짐 지고 오는 허암 뒤로 허연이 산나물을 가득 담은

소쿠리를 이고 졸졸 따라 들어왔다.

허암과 허연이 속세에 있었다면 영락없이 정다운 오누이다.

허공 스님은 흐뭇했다. 열다섯밖에 안 됐지만 허암은 속이 넓고 불심도 깊어

동안거도 거뜬히 치러내 장차 이 암자를 지킬 것이라 확신했다.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 허공 스님이 산책을 하러

계곡을 오르다가 소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콸콸 흐르는 계곡물에 윗도리를 벗은 허암이 네발을 짚고 엎드렸고,

허연이 허암의 등을 밀어주고 있었다.

승복을 말아올려 하얀 종아리를 다 내놓은 허연이와 허암이 낄낄거리며

물장구를 쳤다. 암자로 돌아오는 허공 스님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풀벌레 요란하게 울어대던 깊어가는 가을밤.

소피를 보러 나왔던 허공 스님이 문을 열다말고 얼어붙었다.

등에 달빛을 인 누군가 부엌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발가벗은 허연이 부엌에서 목간을 하고, 그걸 허암이 훔쳐보는 것이었다.

이튿날, 허공 스님이 앞서고 바랑망태를 진 허연이 뒤따라 산 넘고 물 건너

30리 떨어진 여승방(女僧房) 비슬사로 갔다.

허공 스님만 암자로 돌아온 그날 밤,

스님은 허암 방에서 소리 죽여 흘러나오는 울음소리를 듣고

만감이 떠올라 밤을 꼬박 새웠다.

어느 날 허암이 스스로 면벽수도를 하겠다고 자청해 허공 스님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며칠 가지 못했다.

허공 스님이 들이민 바리공양이 그대로 나오기를 이레째. 허암은 쓰러졌다.

허공 스님 품에 안긴 허암은 눈물만 흘렸다.

그렇게 1년이 흐르자 허암은 한참 벌어지던 어깨가 바짝 좁아지고

볼의 살은 쏙 빠지고 나무 한짐 지고 일어서지를 못했다.

얼음장 밑으로 눈 녹은 물이 돌돌 흐르고 살구 꽃망울이 부풀어 오르는 봄날.

허공 스님은 새벽녘에 암자를 나섰다가 저녁나절 암자로 돌아오는데 그

뒤에 허연이 따라오는 게 아닌가. 체면도 부끄러움도 내팽개치고

허암은 달려가 허연을 부둥켜안았다.

그날 밤, 촛불 아래서 찬물 한그릇 떠놓고 허암과 허연이 혼례를 올렸다.

이튿날 아침, 허공 스님은 묵직한 전대를 내놓으며

“이 돈이면 너희들이 속세로 나가 터전을 잡는 데 크게 모자람이 없을 게야.”

밝은 얼굴로 두 사람을 떠나보냈다.

3년이 흘러갔다. 깊어가는 가을날, 허공 스님이 낙엽을 태우고 있는데

누군가 대문 밖에서 사방을 훑어보고 있더니 천천히 등을 돌리는데, 바로 허암이다.

이튿날 새벽, 허공 스님은 숫돌을 꺼내 면도칼을 갈았다.

허암의 상투를 자르고 삭발을 했다.

허공 스님은 허암의 속세 생활에 대해서, 허연에 대해서,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가을바람이 암자의 목탁소리를 실어 삼라만상에 흩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