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청계천을 조성한 태종

우현 띵호와 2023. 5. 12. 23:15

청계천을 조성한 태종 

1410년 8월 8일 큰비가 내려 청계천의 

흙다리였던 광통교(廣通橋)가 무너졌다. 
당시 왕이었던 태종은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돌다리를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여기에 사용한 돌은 정릉에 있는 석물(石物)들로

이를 모조리 파내 돌다리를 만들게 했다. 
정릉은 태조의 계비이자 태종의 계모인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이다. 
원래 덕수궁 근처에 위치했지만 태종은 왕이 되면서 

정릉을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겼다.

신덕왕후는 세자가 될 수 있게 도와 달라는 

이방원(태종)의 거듭된 부탁에도 불구하고 

정도전과 함께 자신의 아들인 방석(태조의 막내아들)을 

세자로 추대했다. 
격분한 태종은 ‘1, 2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방석과 정도전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고 

이 과정에서 태종의 신덕왕후에 대한 미움은 극에 달했다. 
왕비의 무덤을 장식한 돌을 파내 다리를 만들었다는 것은

신덕왕후에 대한 태종의 증오가 그만큼 컸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태종은 백성들이 오가며 이 다리를 밟는 것을 상상하며

신덕왕후에 대한 통쾌한 복수를 꿈꾸었을 것이다. 
이처럼 청계천 광통교는 그냥 다리가 아니다. 
조선 초기 왕권 장악을 위한 권력 다툼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서울의 발전과정에서 복개되었던 

청계천이 십 수 년 전 복원되었다. 
원래 청계천은 자연적으로 생긴 하천이 아니라 

6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인공하천이다. 
1405년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태종이 

의욕적으로 새롭게 만든 인공하천이다.

한양이 조선의 수도로 결정되는 과정에 

몇 차례 우여곡절이 있었다. 
1392년 7월 조선의 수도는 개성이었지만 

태조 이성계의 강력한 의지로 2년 뒤인 

1394년 10월 28일 한양으로 천도(遷都)했다. 
정종이 왕위에 오르고 1399년 3월 다시 개성으로

천도하면서 한양은 잠시 수도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1400년 왕위에 오른 태종은 5년 뒤 

1405년 11월 한양으로 재천도했다.

한양은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한강이 

서해 바다로 빠져나가는 길목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 때문에 수도로 적합했다. 
여기에 동서남북으로 낙산 인왕산 목멱산(남산) 

북악산 등으로 둘러싸인 분지형의 구조는 

도시 방어와 백성 관리에 매우 유리했다. 
물론 단점도 있었다. 
한강이 남산 아래 있다 보니 도심에 흘러드는 물이

쉽게 빠져나가지 못했다. 
도심에 모인 물이 남산에 막혀 바로 한강으로 

빠져나가지 못해 비가 많이 오면 한양 도심은 

홍수 피해로 큰 몸살을 앓았다.

한양으로 돌아온 태종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는 

도심의 홍수 피해를 미리 막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1406년 1월 인공하천을 만드는 

개천(開川) 공사를 실시했다

(청계천은 조선시대에 줄곧 '개천'으로 불렸다. 
'청계천(淸溪川)'이라는 말은 일제강점기 이후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한성부(漢城府)에 소속된 600명에게 개천을 파게 한 것이 

청계천 공사의 역사적인 시작이었다.

하지만 큰비가 내리면 한양이 물바다가 되는 상황은 계속됐다. 
1407년 5월 27일에는 큰비가 내려 

천거(川渠·개천과 도랑)가 모두 넘쳤으며 

1409년 5월 8일에는 큰비가 내려 교량이 모두 파괴되고 

두 명의 익사자도 발생했다. 
1410년 7월 17일에는 도성에 물이 넘쳐서 

종루(鍾樓) 동쪽에서부터 흥인문(興仁門)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통행하지 못할 정도였다.

홍수 피해가 심각해지자 

태종은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거듭 고민한 끝에 태종은 대대적인 공사를 

감행하기로 결심하고 

이런 자신의 의지를 신하들에게 공표했다.

1411년 윤 12월 1일 일이다.

"해마다 장맛비에 시내가 불어나 물이 넘쳐 

민가가 침몰되니 밤낮으로 근심돼 개천 길을 

열고자 한 지가 오래다. 
지금 개천을 파는 일이 백성에게 폐해가 없겠는가? 
혹 자손 대에 이르게 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개천 공사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이것이 

백성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 발언이었다. 
태종의 대표적 참모인 하륜은 이렇게 답한다.
"백성을 적당한 시기에 부리는 것은 

예전부터 내려져 왔던 도(道)입니다. 
창고를 열어 양식을 주고 밤에는 공사를 쉬게 해 

피로해서 백성들이 병이 나지 않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백성들에게 충분히 보상을 하면 공사를 해도 

괜찮다는 것이 하륜의 생각이었다. 
다른 신하들도 태종의 계획에 적극 찬성했다.

1412년(태종 12년) 1월 10일 태종은 마침내 개천도감

(開川都監)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동원해 공사에 들어갔다. 

태종은 개천 공사를 하면서 파루

(罷漏통행금지 해제 새벽 4시에 종을 33번 침) 후에 

공사를 시작하고 

인정(人定·통행금지 밤 10시에 종을 28번 침)이 되면 

공사를 중지할 것을 지시했다. 
이를 어길 시에는 감독관을 문책하겠다고 경고했다.

이 외에도 태종은 전의감(典醫監)
혜민서(惠民署) 제생원(濟生院) 등의 관청으로 하여금

미리 약을 만들 것을 지시했다. 
또 천막을 치게 해 만약에 병이 난 자가 있으면 

치료를 아끼지 않을 것을 주문했다. 
개천 공사에 징발돼 온 지방 일꾼들에게 무리하게 

작업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건강과 구호에 

만전을 기했던 것이다.

청계천 공사의 핵심은 네 곳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담는 도랑을 준설해 이를 한강으로 흘러가는 중랑천과

연결하는 것이었다. 
태종의 의지와 독려 때문인지 최초의 청계천 조성 사업은 

비교적 빨리 완공됐다. 
1412년 2월 15일 '태종실록'에는 1개월여 만에 

공사가 끝난 상황이 기록돼 있다. 
공사 완료 후 태종은 

"하천을 파는 것이 끝났으니 내 마음이 곧 편안하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청계천 조성 사업은 한양이라는 도시의 구조에 

눈을 뜬 태종의 안목과 실천 의지에서 출발했다. 
청계천 공사는 한양의 최대 약점인 홍수 피해에서 

벗어나 큰 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다져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