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무학대사 : 현 난세에 이런 걸출한 인물이 또 없을까?

우현 띵호와 2024. 3. 10. 12:53

무학대사 : 현 난세에 이런 걸출한 인물이 또 없을까?

도선국사로부터 자문, 교훈을 얻어 

고려국을 건국한 태조 왕건의 아야기와, 

무학대사의 자문과 교훈을 받아 

이조(李朝) 왕가를 창업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성공담 같은 사례는 한국과 중국, 일본, 

삼국(三國)의 역사에 교훈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다.
 
삼국의 사례를 보면, 

한결같이 고승으로부터 개국의 창업자는 

자문과 교훈을 비밀리에 받았고, 

민심수람을 위한 비책과 관세음보살전에 

기도하는 방법을 배우고 실천하였다. 

지면관계상 여기서는 무학대사와 이조의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이야기 만을 소개한다.
 
이성계가 젊은 무장(武將)으로 활약할 때, 

어느 날 밤에 기이한 꿈을 꾸었다.
무너져가는 큰 기와집에 들어갔는데 

워낙 낡아서 붕괴 직전이었다. 

이성계는 붕괴가 불안하여 기와집에서 나오는데, 

이상하게도 자신의 등에 석가래 셋을 

가로 짊어지고 나오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깬 이성계는 흉조(凶兆)인지, 

길조(吉兆)인지 스스로 알 수가 없어 

다음날 근처의 유명하다는 여무(女巫)를 찾기로 하였다.
 
유명한 여무(女巫)는 이성계의 꿈 이야기를 듣고는 

강신(降神)하여 신의 해몽에 대한 신탁(神託)을 

알고저 방을을 흔들며 신전에 노력했으나 

이상하게도 강신이 되지 않았다.
 
여무는 정색하여 이성계에게 자신은 도저히

그 꿈 해몽을 할 수 없다고 말하고, 

가까운 설봉산 토굴에 한 고승이 혼자 수행하고 있으니 

찾아가면 해몽을 들을 수 있다고 권하였다.
 
이성계는 혼자 토굴의 고승을 찾아가 예를 갖추고 대면했다.

그 고승이 바로 무학대사였다.

무학대사는 이성계가 오기 전에 이미 그가 온다는 

전조(前兆)를 통해 알고 있었고, 

이성계의 관상을 살핀 후, 꿈 이야기를 들은 무학대사는

금방 의미를 깨닫고 이성계에게 누가 엿들을것을

두려워 하는 듯 나직히 말했다.
 
“낡아 붕괴되는 큰 기와집은 망해가는

 고려국(高麗國)을 의미하는 것이요, 

그 집에서 나오면서 등에 석가래 셋을 짊어지고 

나왔다는 것은 왕(王)을 의미하는 것이니, 

장군은 장차 새로운 나라의 왕이 될 것이라는

천기를 미리 깨닫게 해주는 길몽입니다.
 
차후 어느 누구에게도 두 번 다시 

그 꿈 이야기를 해서는 안됩니다.”
그날 무학대사는 이성계에게 재삼 꿈 아야기를 

두 번 다시 해서 천기(天機)를 누설하여 

대업을 스스로 망치는 입조심을 강조하며,
 
첫째, 

백성의 민심은 물론, 수하 장병들과 여타 장병들까지 

민심을 얻는 노력을 기울이라 했고, 

둘째, 

신불(神佛)전에 남몰래 기도하여 

가호를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날, 이성계와 무학대사는 서로의 손을 힘차게 잡았다.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자문대로 

첫째, 백성과 장병들의 민심을 얻는데 진력하고,
 
둘째, 금산(錦山)을 비롯한 명산에서 남몰래 

산기도를 드리고, 석왕사(釋王寺)에서 기도를 드렸다. 

특히 신분을 승려들에까지 숨기고 관세음보살전에 

간절히 기도하고, 명상, 즉 속마음으로 소원성취의 

축원을 드렸다 전한다.
 
이성계 장군과 무학대사는 친구와 같이 다정하게 

지내면서 단둘이서 막걸리 즉 곡차(穀茶)를 

마시면서 국운이 쇠진해가는 고려에 대해 

우국(憂國) 우민(憂民)과 또 백성의 태평성세에 

대해 밤새워 토론하였다.
 
무학대사는 평소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부운(浮雲)처럼 혼자 전국을 돌아 다니는지 

자취를 감추다가 때가 되면 가끔씩 

이성계장군을 찾았다. 

대업의 때를 은밀히 묻는 이성계 장군에게 

무학대사는 “아직 때가 오지 않았으니 

부지런히 민심을 얻는 일을 많이 하고, 

관세음보살전에 기도할 것”만 강조하였다.
 
마침내 이성계가 고려의 대병력을 지휘하는 때가 도래했다.
당시 고려국의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지위에 있는 최영 장군이 이성계 장군에게 특별한 명령을 내렸다.
 
대병력을 내줄 터이니 망해가는 원(元)나라를 지원하는

차원에서 새롭게 요원의 들불처럼 일어나는

명(明)나라를 토벌하라는 군령을 내린 것이다.

이성계는 황급히 무학대사를 찾아 자문을 얻고자

찾았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행방 묘연한 무학대사에 대해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이성계는 병력을 이끌고 중국 땅으로 진격하는 

변경지역인 '위화도'에 진을 쳤다.
 
드디어 최영 장군의 특사가 군대를 지휘하여 

즉시 명나라를 치라는 명령을 받은 이성계가

 출병 직전의 밤, 칠흙 같은 밤, 은밀히 무학대사가 

이성계의 장막을 찾았다.
 
그동안 무학대사는 중국 땅에 건너가 원(元)나라가 끝나고,

새로운 명(明) 나라가 중국 대륙을 거의 장악한 것을

직접 목도하고 황급히 귀국하는 길이었다.

무학대사는 엄숙히 이성계의 귀에 거병(擧兵)의

때가 왔다고 말했다.
 
무학대사의 거병의 이유인즉, 첫째, 이미 망해가는

원(元)나라가 기사회생(起死回生)할 수 없는 것을

고려국의 장병이 생명을 바쳐 지원하여 구할 수 없고,

오히려 고려국의 장병들만 전투에서 죽어

다시는 귀국하여 고향의 부모형제 처자를 볼 수 없고,

해골조차 중국 땅에 버려진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친히 목도했지만, 중국 한족이 중심이 되어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 몽골계의 원나라를

중국 땅에서 거의 쫓아 냈다는 것을 강조했다.

특히 명군(明軍)은 백만이 넘는 대병이어서

몇 만의 고려국 장병은 도저히 승산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우쳐 주었다.
 
무학대사는 최영의 원나라를 지원하는 출병은,
첫째,

이성계를 위시한 마음에 들지 않는

장병들을 중국 땅에서 죽게 하는 것이요,
 
둘째, 

막강한 원나라를 멸망시키는 명나라의 

군대가 격노하여 고려국을 보복 침공하여 

대살륙을 초래하는 위험한 작전이어서, 

그 작전을 실행하려는 고려의 왕과 최영은 

중국의 천하대세를 전혀 모르는 우물안 개구리 같아서 

나라와 백성과 출병의 장병들을 몰살 시키는 

천하의 둘도 없는 어리석은 군사작전이라는 것을 

이성계에게 깨우쳐 주었다.
 
수명이 다 된 고려국은 망할 지언정

장병과 백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전장병들에게 날이 새면 폭로하듯 알려주면

분노한 장병은 자신들을 승산없는 사지(死地)로

내몰아 중국 땅의 고혼이 되게 하는 자들을 응징하고,

새나라를 개국하는 데 앞장 설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무학대사는 중국 땅에 새로운 나라가 들어서고,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는 때이기 때문에 

이 땅에 원(元)에 충성하는 고려국을 새나라로 

바꾸는 것은 새로운 중국의 명황제(명황제)가 

시비하지 않고 오히려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자문해주었다.
 
다음날 이성계는 장병들에게 중국정치의 정통한 사정과 

고려군의 출병이 장병들은 몰사하고, 

명나라의 보복전쟁으로 고려국의 백성은 

몰사한다는 것을 연설했다.
 
이미 망한 원(元)의 지원을 위해 고려국의 장병이 

한 번 중국 땅에 출병하면, 살아서는 고향의 부모형제,

처자를 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여 연설했다.

과연 고려군은 하늘이 떠나가라 분노의 함성을 내지르며

자신들을 죽이려는 최영을 타도하기 위해

회군(回軍)하자는 성난 군심(軍心)으로 돌변해 버렸다.
 
무학대사는 중국이 원(元)나라가 망하고, 

새로운 나라 명(明)으로 바뀌는 중국정치를 

절묘하게 이용하였다. 

고려인들도 중국처럼 백성이 원하는 새로운 나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은
 
첫째, 

명나라 주원장을 움직였고,천명(天命)의 이씨조선의 

개국을 위해 이성계를 움직인 것이다.
중국 땅에서 원(元)나라를 멸망시킨 새로운 제국

명(明)의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누구인가?

주원장은 중국 역사에 유일무이(唯一無二)하게도 

황각사(皇覺寺)에서 출가 위승한 법명이 

법해(法海)라는 탁발승려였다. 

법해는 황각사의 경제가 어려워 탁발을 다니다가 

24세에 미륵불의 재림이 왔다고 선전하는 

미륵교도들 일명 원나라에서는 홍건적(紅巾賊)이라 부르는 

민중의 군대에 졸병으로 투신했다.
 
법해는 주원장(朱元璋)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지혜와 용기가 출중하여 언제나 전투에 앞장 서는 

상승장군(常勝將軍)이었다. 

주원장은 44세에 명(明)의 황제위에 올랐다. 

주원장 역시 열열히 관음기도를 하는 황제였다.
전해오는 항설(巷說)에 의하면,

주원장은 황제가 되었지만 두 가지 근심이 있었다.

첫째, 출신이 탁발승려였기에 군심(軍心)과 민심이

비웃고 조롱하는 것이요,

둘째, 몽고로 패주한 원(元)이 고려국 같은 속국의

군대와 연합하여 다시 중원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크게 근심하였다.
 
따라서 주원장은 승려들을 황궁에 초대하여 거하게 

대접하고 황금을 불사에 쓰라고 나눠주면서 

자신이 같은 승려 출신이었음을 상기시키며, 

나이로 따져 사형사제로 불렀다 한다.
 
황궁에서 대접받고 황금까지 받아 만족해하는

승려들의 귀에 주원장은, 자신은 운수좋은

승출신 황제가 아니라,하늘이 낸 진명천자

(眞命天子)라는 것을 중국 전역에 홍보해줄것을 부탁했다.
 
주원장이 황궁으로 전국 고승들을 초대하여 대접할 때, 

승려들의 무리속에 무학대사가 끼어 있었다고 전한다. 

무학대사는 유창한 중국어로 황제의 근심인 

망한 원(元)나라의 군대가 고려국의 군대와 

연합하여 명(明)을 침공하는 일을 막아주겠다고 말했다.
 
조건으로 중국에도 새로운 제국을 개국 했듯이, 

고려땅에 새나라를 개국해야 할 터이니 

이를 무조건 인정해주고 지원해줄 것을 청했다.
 
주원장은 주위를 급히 물리치고, 

무학대사의 손을 잡고서는 

“사제는 나의 근심을 꿰뚫보는 혜안이 있구먼.
 
사실 나도 사제처럼 운수납자로 살아야 하는데, 

머리를 기르고 황제 노릇을 하고 있으니…. 

늘 부처님께 송구한 마음이지…. 

그러나 내가 원(元)을 타도하고, 명(明)을 개국하고, 

사제가 고려에 새나라를 개국하는 일에 기여하는 것은 

나같이 하늘과 제불보살의 뜻이야.
 
우리가 어찌 하늘의 뜻을 거스리겠는가? 

그런데 개국할 큰 인물은 있는가? 

반드시 원(元)의 편에 서지 않게 막아 주시게.”
 
명태조 주원장은 임종시까지 관음기도를 했다. 

그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타인 출입엄금의 방에 자신이 예전에 탁발 다닐 때의 

낡아 헤어진 삿갓, 더덕더덕 누빈 헌 승복, 

낡고 때묻은 걸망을 놓아두고, 

가끔씩 혼자 방안에 들어가 만지면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관세음보살님께 감사하며 

소리없이 울었다 한다.
 
무학대사의 자문대로 이성계는 이조(李朝)를 개국했고, 

명(明)나라의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무학대사는 이성계에게 새로운 나라 

조선의 수도를 한양으로 정해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 후 무학대사가 이성계 앞에 나타난 것은 

태종 이방원이 이성계가 작은부인 강(康)씨 부인의 

아들을 왕위 후계자로 정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강씨 부인의 아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는 

소위 왕자의 난(亂)을 일으킨 후이다.
 
이성계는 작은 댁 강씨 부인의 아들을 모조리 살해한 

태종에 대해서 노기충천하여 한양을 떠나 

함흥에 머물면서 태종을 죽이려는 계획을 짜고 있었다. 

태종은 태조인 아버지를 함흥에서 대궐로 

모셔오기 위해 사자를 보냈다.
 
성난 이성계는 찾아오는 태종의 사자를 번번히

화살로 쏘아 죽이는 것을 반복했다.

그것을 돌아오지 않는 사자라는 뜻에서

'함흥차사(咸興差使)'라 칭한다.
 
이성계가 태종의 사자로서 자신을 설득하려 오는 

함흥차사를 화살로 쏘아 죽이는 것을 반복할 때, 

어느 날, 홀연히 무학대사가 이성계 앞에 나타났다. 

이성계는 무학대사에게 화살을 쏠 수는 없었다.
 
그날, 무학대사는 꾸짖듯 이렇게 이성계를 깨우쳤다. 

'이씨 조선이 오백년을 가는 천운인데, 

대왕이 천운을 망치고 있습니다. 

정말 강씨부인을 위해 천운을 망칠 거요?' 

무학대사는 또 이렇게 꾸짖듯 말했다.
 
“이제 대왕은 정치를 방하착(放下着)할 때가 되었지 않습니까?

장수(將帥)로 있을 때, 왕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명을 칼과 화살로 죽였습니까?

그것이 모두 악업인데, 또 함흥차사를 화살로 쏘아 죽여

악업을 짓습니까?
 
곧 저승사자가 찾아올 터인데, 생전에 부처님과

관세음보살전에 대왕이 죽인 사람들의 영혼 천도제를

지내면서 남은 여생을 살아야 양심이 있는

불자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즉시 사람죽이는 일을 중지하시고, 한양으로 돌아가십시오.”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말에 크게 깨달았다. 

한양으로 돌아갈 것을 약속하며 함께 잠에 들었다. 

이성계가 눈을 떠보니 무학대사는 홀연히 사라지고

몇 자의 경책(警策)의 글이 남겨 있었다.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경책(警策)대로 태종을 

후계자 왕으로 정식 인정하고, 자신은 회암사 등 

사찰을 찾아 다니면서 그동안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영혼천도를 위해 관세음보살전에 기도하고, 

자신의 영혼을 위해 관세음보살전에 기도하다가 

목숨을 마치는 순간을 맞았다.
 
이성계는 죽음을 앞두고 무학대사를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 찾았다.

그러나 무학대사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진정 명리(名利)를 떠난 무학대사는 하늘의 뜻이 

이씨 조선을 원하고, 그 기간은 5백년이 간다는 것을 알고 

이성계를 인도해주고, 소임을 다한듯, 사라졌다.
 
어느 산 토굴에서 홀로 입적했을 것이라는 

풍문만 무성할 뿐, 무학대사를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학대사는 무소유를 실천하며 수도승의 진정한 표본이요,

중생계가 다할 때까지 대자대비를 실천하는

관세음보살의 제자인지 모른다.
 
종북 승려들이 조계종에 진지(陳地) 파놓고, 

대한민국 망치기에 맹활약중이라는 소리와 도박승, 

고급 룸살롱 출입 승려들 지탄 소리가 충천하는 이 시대, 

대한민국에도 무학대사 같은 수도승은 존재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