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글

어느 시골 노인의 글

우현 띵호와 2024. 3. 10. 13:31

어느 시골 노인의 글

그믐이 되얏는가?

어린 중천에 초승달 걸렸는데

쏟아질 듯 반짝이는 별

무더기에 마음이 시리네.

 

명절에 맏이네는 큰놈

중간고사라고 차례상 앞에

궁둥이 두어 번 조아린 뒤 그 길로

내빼더니 전교 1등은 따 놓은

당상이렷다.

 

둘째네는 보리와 콩도

분간 못 하는 코흘리개를 데리고

명절에 유럽으로 역사여행 간다더니

이순신보다 나폴레옹 생애를 줄줄

외는 신동이 나겠구나.

 

막내며느리는 당직이라고

우는 시늉을 하더니 혹 몸져누운 것이냐.

 

요즘처럼 황망한 세상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삼 형제가 약속이나 한 듯 감감하니

아비 어미 죽어 달포가 지나도

부고 낼 자식이 없을까 두렵도다.

 

내 오늘 단체 카카오톡을 소집한 것은

중차대해 전할 말이 있어서다.

너희 어머니, 즉 내 아내가 쓰러졌다.

 

당나라 군대에 쫓기듯

차례상 걷기 무섭게 달아난

자식들이 남긴 설거지와 빨래,

먼지 더미를 사흘 내 쓸고 닦더니

새벽녘 밭일 간다고 나서다 고꾸라져

응급실로 실려 갔다.

 

의사 왈, 고혈압, 당뇨, 갑상샘 약을

달고 사는 노인네가 끼니는 거르고

중노동만 하니 몸이 배겨내겠소.

그 와중에도 자식들 심란하게

전화 걸지 말라는 너희 어미를 보며

내 가슴을 쳤노라.

 

저 여자는 무슨 죄 이서

평생 구두쇠 서방 잔소리에 망나니

사내자식들 키우면서 쓰다 달다

말이 없는가.

제사도 1회, 명절도 1회로 줄였거늘

그도 못마땅해 입이 댓 발 나온

며느리들 눈치 보느라 전전긍긍하는

저 여인은 바보인가 천치인가!

 

두 늙은이 굽은 등으로

다리 절며, 고추며, 열무를 수확해

앞앞이 택배를 올려보내도 고맙다

전화 한 통 없는 자식들은 원수인가?

애물단지 인가하여 결단했느니,

 

앞으로 우리 집안에

명절은 없다. 제사도 없다.

칠순이고, 팔순이고, 생일잔치도

막살할 것이며, 어버이날이니

크리스마스니 하여 요란 떨 일은

더더욱 없다.

 

고로 상속도 없다.

 

우리 부부 가진 거라곤

벼룩 콧등만 한 집 한 채

뿐이나 무덤에 지고 갈지언정

너희한테 물려주지 않겠다.

 

군청 말단으로 취직해 봉급은

쥐꼬리만 하나 손끝 맵고 짜게

살림하는 여인 만나 아끼고 쟁여온

덕에 죄다 간 장만한 재산이다.

 

이를 남김없이 갖다 팔아

바다 건너라고는 울릉도밖에

못 가본 저 늙은 아내와

세계 곳곳을 주유천하며

몽땅 써버리고 죽으련다.

 

나의 아내에게도 면세점이란

그곳에서 외제 화장품, 외제 손가방도

사줘 보고,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연애했다던 프랑스 카페에 가서

쓰디쓴 커피도 한 잔씩 마셔볼 것이며,

천국과 한 뼘 거리라는 융프라우에 올라

온 세상 발밑에 두고 사진 한 방 멋지게

남겨보련다.

 

우리가 돈을 쓸 줄 몰라 허리띠

졸라맨 줄 아느냐.

영어를 몰라 해외여행 마다한 줄 아느냐.

한 치 앞 안 보이는 세상,

앞길 구만리인 자식들에게

한 푼이라도 보탬이 될까?

이 악물고 살아온 죄밖에 없느니, 그런

우리한테 꼰대니 틀딱이니 손가락질

하는 인심이 기가 차기만 한 대,

내 자식도 별수 없다.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진다.

내 비록 날 샌 올빼미 신세이나

가장(家長)의 이름으로 남기는

마지막 부탁은 부디 덕과 예로써

세상을 살거라. 의로운 것이 아니면

머리카락 한 올도 취하지 말고,

자식들은 재주보다 덕(德)이 앞서는

사람으로 키워라.

 

또한 아끼며 살거라.

 

사람 잡아 가두느라 온 나라가

시끄럽고 권세가들 헛된 꿈과

아전들 잔꾀에 백성들 곳간엔 해

넘길 양식이 없나니,

밤낮 궁둥이에서 비파 소리 나게

놀러만 다니다간 쌀독이 바닥날 터.

 

사방에 승냥이 떼들 덤빈다고

분기탱천하지도 말거라.

적을 두려워하며 대처하는 자는

이길 것이나, 세상에 나만 한 사람

없다고 믿는 자는 망하리라.

 

아닌 밤 홍두깨 유언에 요강

뚜껑으로 물 떠먹은 낯빛일 것 없다.

바람처럼 와서 구름처럼 머물다

가는 것이 인생. 천지간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 창공을 훨훨 나는 두 마리

학처럼 세상을 떠돌 것이니,

 

어느 날 우리 내외 부고가

들려와도 슬퍼하지 말거라.

오뉴월 물 오이처럼 쑥쑥 자랄 내 손주들

못 보는 것이 다만 애통할진저.

 

※P.S: 여행 갈 때 등산복

좀 입지 말라고 눈 흘긴 게 둘째더냐.

 

너희가 멀쩡한 바지를 찢어 입든

꿰매 입든 내 일절 참견하지

않았느니,

 

우리가 빤스만 입고

비행기를 타든 머리에 태극기를

두르든 괘념치 말라.

'감동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혜받은 사실을 알고 있나요  (0) 2024.03.12
가르치는데 8만리, 배우는데 8백리  (0) 2024.03.10
부자 나라, 스위스 국민의 위기의식  (0) 2024.03.04
보 은  (0) 2024.03.04
초심을 가꾸자  (0) 2024.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