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국부 이승만 대통령

우현 띵호와 2021. 8. 8. 23:32

국부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은 1875年 태어난 인물로

출생일 기준으로 정조 사망(1800年)의 시간적 거리가

2019年인 오늘보다 더 짧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전의 인물이다.

그는 조선의 왕족 출신으로서

조선 왕조의 폐위와 공화정 도입을 제창했다는 반역 혐의로

20대의 대부분을 한성 감옥에서 보냈다.

이때 맞은 곤장 100대와 겪은 고문의 후유증은

그를 일평생 안면경련증에 시달리게 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가들 중 유일무이하게 무국적을 고집했던 사람이다.

그는 대한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고,

아니 반드시 독립케 할 것이라는

사명과 믿음을 갖고 살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서재필과 안창호의 국적은 미국,

김구와 이회영의 국적은 중국이었다.

우남을 제외한 모든 독립운동가들을 다 합쳐도

독립을 향한 절실하다못해 지독한 열망, 신념, 행위는

우남 하나에 미치지 못한다.

미국엔 건국의 아버지들인 Thomas Jefferson,

Benjamin Franklin, John Adams가 만든 <독립 선언서>가 있다면,

대한엔 이승만이 집필한 <독립 정신>이 있다.

이승만은 하버드에서 석사를 마치고

자신은 2년 안에 조국을 위해 귀국해야 하니,

그 안에 박사과정을 마치도록 협조해 줄 것을 하버드에 요청한다.

그러나 거절당하여 프린스턴으로 가서 박사를 마치게 된다.

그는 윌슨 총장에게 직접 국제법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는데,

윌슨 총장은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미국의 제 28대 대통령이 되는 우드로 윌슨이다.

윌슨 대통령은 우남을 매우 아껴 애제자이자 파트너로 칭하고

가족 파티에도 그를 항상 초대하였으며,

그에 대한 전폭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Princeton Univ.에는 Woodrow Wilson School, 일명 우디우,

WWS가 있는데 프린스턴 학부생 중에서도 최상위 클래스의

학생들만 들어갈 수 있다.

일단 합격이 되면 정부 고위직 관료층을 형성하고 있는

졸업생들의 후광과 인맥, 엄청난 후원과 인턴쉽이 주어지며

각국의 대사들에게 논문 협조를 받기도 한다.

3학년을 시작하면 학기마다 있는 Policy Task Force에서는

교수들과 실제 국제 정세에 적용시킬 수 있는 정책을 만들어서

미국 의회와 UN 상임위원회에 제출하는데,

채택되는 경우도 흔하다.

University of Oxford에는

WWS 전공자만 받아들이는 코스가 있다.

그리고 이 WWS에는 이승만 홀이 있다.

광복 1년이 지나고 미 군정이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자유가 무언지 모르는 국민들은 전 국민의 77%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보통 선거권과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통한 사유재산권 제도를 바탕으로

자유 민주 대한민국을 건국하였다.

그는 국가 재정의 10% 이상을 교육에 투자하고

초등교육 6년 무상 의무교육제를 도입하여

1948년 문맹률 80% 글을 모르는 개돼지 민족은,

10년만에 문맹률 20% 대다수가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임기동안 2만명 이상의 인재들을 국비유학 보냈으며,

이들은 이 후 박정희 시절, 이 나라의 근대화/공업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승만은 본인이 왕족 출신임에도 조선 왕조를 극도로 싫어했으며,

해방, 건국 후에도 이씨 왕족들을 홀대했다.

그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후 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의 영웅인 아이젠하워 美 대통령을 만나

태극기를 선물하였는데,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 손으로

태극기를 받자 ' 국기는 두 손으로 받는 것 ' 이라며

태극기를 도로 뺏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사과를 한 후,

다시 두 손으로 태극기를 받아들곤 악수를 요청했다.

대한민국의 국부, 우남 이승만에게 친일파 프레임을 씌우려는

좌익들의 농간은 솔직히 너무나도 저능하고 멍청해서

반박할 가치조차 없다.

참고로 독도가 우리 땅이 된 것은 이승만의 억지 때문이다.

해방 후 미 군정이 설정한 일본의 수역 경계선인 맥아더 라인이

52년 무효화되자 이승만은 미국 / 일본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통령령으로 독도를 포함하는 해양 경계선을 강제,

일방적으로 그어 버린다.

우남은 이 평화선을 넘는 일본 배는 모두 나포하라고 지시했으며,

실제로 우남은 일본 어선 328척, 약 4천여명을 억류했고

그 중 48명이 사망하였다.

미국의 지도자들조차 때때로 자신들을 뛰어넘는

우남의 지독한 반공, 반일 정신에 혀를 내둘렀다.

그 놈의 한강다리 진실?

한강다리 폭파 명령은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 장군이 지시하였고,

공병감인 최창식 대령이 직접 폭파했다.

그 후 우남은 독단적으로 행동한 죄를 물어 총참모장 채병덕 장군을

사형하려 했으나, 이미 그는 전쟁중 전사하여,

실행자인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1950년 9월 21일 부산에서 군법 총살한다.

최창식은 재심을 거쳐 1964년, 14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아 사후 복권되었다.

대한민국을 낳았지만 대한민국이 버린 남자,

국부,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은,

1965년 7월 19일 美 하와이 마키키의 한 목조건물 외딴 골방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

Galatians 5:1 성경 구절을 유언으로,

마지막 소원이던 고국의 땅을 다시 밟아보지 못한 채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