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⑴거위 목숨

우현 띵호와 2021. 9. 18. 02:17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⑴거위 목숨

흑진주 도둑으로 몰린 선비
“거위도 곁에 묶어주시오”

한자락 저녁 햇살을 잡고 있는 산허리를 돌아 초췌한 선비가

때 묻은 두루막 자락을 여미며 양지마을에 발을 들여놓았다.

찾아간 주막에 객들이 꽉 차서 주모가 가르쳐 준 대로 이 진사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 진사는 천석꾼 부자에, 비록 급제는 못했지만 출중한 문재에,

문객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했다.

그 집 사랑방은 손님이 끊일 날이 없었다.

오가는 선비들이 이 진사와 술잔을 나누며 담소하다가

때로는 자고 가기도 하는 곳이었다.

나그네 선비가 이 진사네 대문을 두드려 주막집 사정을 조심스럽게 얘기하자

이 진사가 반갑게 맞아들였다. 사랑방에 마주 앉아 몇 마디 얘기를 나눠본즉,

의관은 허술하지만 선비의 학식이 이만저만이 아니란 걸 이 진사는 금방 알아차렸다.

이 진사가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손님을 모셔 놓고 큰 결례를 해야겠습니다.

등 너머 동네 상가에 문상을 하고 가급적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선비가 화답했다.
“소인은 염두에 두시지 말고 천천히 다녀오십시오.”
선비는 저녁 식사 전에 간단한 주안상을 받아 약주 몇잔을 마시고

모란향에 취해서 안마당으로 나왔다.

이 진사의 대여섯살 먹은 알밤 같은 손자 녀석이 혼자서 구슬치기를 하고 있었다.
낯선 선비에게 자랑이라도 하듯 이번엔 제기 차기를 했다.

“선비 어른도 제기 한번 차 보세요.”
선비가 제기를 받아 들고 단 세번 차고 땅에 떨어뜨리자

아이도 웃고 선비도 웃었다.

어둠살이 내리자 아이는 안채로 들어가고 선비는 사랑방에서 저녁상을 독상으로 받았다.

저녁상을 물리고 벽에 기대어 깜빡 잠이 들었나, 안마당의 왁자지껄한 소란에

잠이 깨어 문을 열었더니 횃불이 춤을 추고 하인들의 악다구니가 이어졌다.

“사랑방 선비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실직고하시오.”
나이 지긋한 집사가 마당에서 선비를 쳐다보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무슨 말씀이시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선비의 말끝을 받아 행랑아범인 듯한 노인네는

삿대질을 하며 밤공기를 찢었다.
“여의주를 내놓으란 말이오.”
이 집 가보로 내려오는, 여의주라 일컫는 흑진주를 어린 손자 녀석이 함에서

꺼내 구슬치기를 하다 잃어버린 것이다.

하인들이 선비를 끌어내 기둥에 포박하고 집사는 선비의 단봇짐을 뒤졌다.
“여기 감추어 둘 리가 없어. 날이 새면 관가로 끌고 가 문초하면 입을 열 테지.”
독을 품은 안방마님이 문을 빼꼼히 열고 눈을 흘겨보고 있었다.

기둥에 묶인 선비가 입을 열었다.
“소인의 청 하나만 들어주시오. 마당가에서 졸고 있는 저 거위도 제 곁에 묶어놔 주시지요.”
어려울 것이 없어 마당쇠가 거위를 붙잡아 다 리를 옭아매어 기둥에 묶었다.

밤은 깊어 삼경일 제, 마당 복판 횃불 옆에서 하인들이 졸고 있을 때

문상 갔던 이 진사가 거나하게 취해서 돌아와 안마당에 발을 들여 놓으며 깜작 놀라

“이게 무슨 짓이냐!” 벽력같은 고함을 질렀다. 집사가 상황을 설명했다.

바로 그때, 기둥에 묶인 선비가 “여기 거위 똥을 한번 보시오.”
거위 똥에 여의주라 불리는 흑진주가 섞여 나온 것이다. 이 진사가 물었다.

“손자 녀석이 구슬치기하던 흑진주를 거위가 먹는 것을 보았소이까?”
“손자는 못 보고 소인이 봤습니다.”
“그럼 왜 이 고초를 당하기 전에 말하지 않았소?”
제가 본 대로 얘기했다면 애꿎은 거위가 목숨을 잃었을 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