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21) - 회갑선물

우현 띵호와 2021. 9. 22. 02:52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21) -

회갑선물이대감 얼굴에 먹칠하고 다니는 늦둥이 막내아들 결국 집나가…
5년만에 여인 둘을 데리고 와서 한사람은 아내라 소개하고
또다른 색시를 인사시키는데

 

이 대감은 딸 하나 아들 셋이 있다.

맏딸은 유 대감 댁으로 시집가 조신한 신부로 잘 살고 있고,

맏아들은 천석꾼 집안 살림을 꾸려가고,

둘째 아들은 급제하여 부사로 봉직하고 있는데,

늦게 본 열여섯살 막내아들이 이 대감 얼굴에 먹칠을 하고 다니는 것이다.

막내아들 항곤은 어릴 때부터 낮이면 서당을 빼먹고 못된 친구들과

저잣거리를 배회하고 밤이면 닭 서리를 도맡아 했다.

머리가 조금 굵어지더니 색줏집에 출입하며 곳간의 곡식도 퍼가고

제 어미 농 속의 주머니도 뒤지고 끝내는 이 대감 방에 있는 다락 속의

전대에도 손을 댔다.

봉놋방에서 노름으로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하고 어떤 날은 무슨 시비에

휘말렸는지 멍이 든 눈에 다리를 절면서 들어오기도 했다.

항곤 때문에 이 대감 집은 바람 잘 날이 없다.

꼭두새벽에 왈패들이 대문을 박차고 들어와 노름판 외상값을 받으러 왔다고

고래고래 고함치다가 하인들과 안마당에서 육탄전을 벌이기도 했다.

점잖은 이 대감이 사랑방에서 유림의 문객들과 시를 짓고 있을 때도

색줏집 주모가 찾아와 안마당에서 행패를 부려 이 대감이 얼굴을 못 든 때도 있었다.

이 대감은 회초리로 항곤의 종아리를 때리다가 이제는 몽둥이를 들었다.

비가 억수로 내리는 가을밤에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맞은 항곤이

대문을 박차고 나가더니 그 후로 행방이 묘연했다.

사흘이 지나고 한달이 지나도 항곤은 돌아오지 않았다.

항곤 어미가 사람을 풀어 백방으로 찾아봤지만 바람처럼 사라진 그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났는데도 항곤을 봤다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항곤은 어미가 죽었을 때도 나타나지 않았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에 촛불 아래서 글을 읽던 이 대감은 부인 생각에,

그리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를 막내아들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이 대감의 회갑날이 한달 앞으로 다가왔다.

맏아들은 이 대감의 회갑 선물로 여섯달 전부터 드넓은 뒤뜰을 파서

연못을 만들고 한복판에 섬을 조성해 그 위에 정자를 짓고 있다.

물이 가득한 연못에 비단잉어를 넣고 연꽃도 심고,

정자엔 기와를 이으며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회갑날 이 대감의 문우들과 유림들은 한결같이 맏아들의 효심을

칭찬하느라 입이 닳더니, 둘째 아들이 털이 반들거리는 늘씬한 백마를

회갑 선물로 몰고 오자 이번엔 모두 둘째 아들을 치켜세웠다.

유씨 문중에 시집간 맏딸은 금박에 노리개를 단 화려하기 그지없는

가마를 회갑 선물로 가져왔다. 모두가 입을 벌렸다.

술잔이 돌고 풍악이 울리고 소리꾼의 창이 이어지며 회갑연의 흥이

무르익을 때쯤, 옥색 비단 두루마기를 휘날리며 훤칠한 젊은이 하나가

대문에 들어섰다. 그 뒤에는 곱게 차려입은 여자 둘이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채 따라 들어왔다.

젊은이는 성큼성큼 이 대감 앞으로 가더니 “아버님, 절 받으십시오” 하며

넙죽 절을 했다.

개차반 항곤이 돌아온 것이다.

5년 전 집을 나간 항곤은 한양 큰 노름판에서 한밑천 잡고 제물포에서

새우젓 장사로 거상이 되었다.

항곤이 “제가 장가를 갔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를 따라온 30대 중반쯤 되는 얌전한 색시가 이 대감에게 큰절을 올렸다.

그러고 나서 항곤이 또 다른 여인을 소개했다. “아버님, 회갑 선물입니다.”

박수 소리가 우레처럼 터지고 그 여인은 꿇어앉아 이 대감에게

술 한잔을 따라 올렸다.

그날 밤 이 대감은 그녀를 끼고 자며 회춘을 했고,

이튿날 이 대감의 맏딸과 세아들은 그 여인을 어머님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