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27)우물가의 나막신

우현 띵호와 2021. 9. 22. 02:54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27)우물가의 나막신

재물·처자식 남 부러울 것 없는
천하의 악성 난봉꾼 ‘조도필’
빨래터서 만난 천하일색에 반해
몰래 뒤따라 가는데…

난봉꾼은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양성(良性)이고 다른 하나는 악성(惡性)이다.

난봉꾼이라면 다 같이 못된 것들이지 거기에 무슨 양성과 악성이

따로 있는가 할지 모르지만 분명코 두 부류는 다르다.

양성 난봉꾼은 조강지처에게 죄를 짓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 상대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을뿐더러 딴에는 적선을 하는지도 모른다.

이 치들이 상대하는 여자는 저잣거리에서 술장사하는 들병이,

선술집에서 동한 술손님 상대하는 은근짜,

가무보다 매음이 본업인 삼패 기생…. 소위 ‘만인의 연인’들이다.

그러나 악성 난봉꾼은 다르다.

감언이설로 총각 행세를 하며 여염집 처녀를 범하고,

정절을 지키는 과부를 겁탈하거나 남편 있는 유부녀를 덮치고,

그도 모자라 여승을 파계시키고….

서른여덟 조도필은 악성 난봉꾼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전답 덕에 천석꾼 부자에다 조신한 부인과의 사이에

꽃봉오리 같은 열일곱 맏딸 아래로 달 같은 아들 삼형제를 둬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데, 이 인간은 제 복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조도필도 처음엔 양성 난봉꾼이였다.

어린 기생 머리도 얹어줬고 시조가무에 능한 기생도 품어봤지만

쾌락은 자꾸 줄어들어 기방 출입이 시들해진 것이다.

어느 날 조도필이 산 너머 막실마을에 당숙 문상을 가는데

동네 어귀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여인을 보고 그만 발이 붙어버렸다.

물 한바가지를 얻어 마시며 말을 붙이고 길로 올라와서는

돌아앉아 빨래하는 천하일색 그 여자의 엉덩이 곡선을 보며 침을 삼켰다.

조도필은 멀찌감치 숨어서 담배를 피우다 그녀가 빨래를 마치고

돌아가는 걸 미행해 집을 알아뒀다.

알고 보니 그녀의 남편은 어릴 적 서당 친구인 이 진사로,

친하지는 않지만 장터에서 만나면 대폿잔도 나누는 사이다.

그 다음 장날, 조도필은 막실고개 아래서 숨어 기다리다

이 진사가 마을 사람들과 장에 가는 걸 뒤따라가 점심나절

우연히 만난 척 장터에서 이 진사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국밥집에서 대폿잔을 돌리며 옛날 서당 얘기로 꽃을 피우다가

조도필이 이 진사의 소매를 끌어 기생집으로 갔다.

가냘픈 백면서생 이 진사는 생전 처음 와본 기생집에서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화려한 기방과 수라상 같은 상차림보다는

선녀 같은 기생들이 시조를 읊는 데 넋이 나갔다.

주거니 받거니 술잔은 계속 돌아갔다.

팔척장신에 허우대가 멀쩡한 술고래 조도필이 뻗어버린

이 진사를 부축해 기생집을 나간 건 거의 이경이 가까워서였다.

이튿날 아침 막실로 가는 고개 아래 개울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애간장을 녹이는 곡소리가 하얀 서릿발 위로 흘렀다.

동지가 지나 살얼음이 어는 지난 밤, 술 취해 인사불성인 이 진사가

개울에 빠져 조도필이 건져내 두 사람 모두 개울가에 쓰러졌는데

이 진사는 얼어 죽고 조도필은 살았다.

조도필은 자기가 이 진사를 죽였다며 대성통곡했다.

그 후 천하일색 이 진사의 미망인 집에 쌀가마를 바라바리 보내고

쇠고기와 조기를 장날마다 보내더니 이 진사 무덤에 풀도 마르기 전에

상복 입은 그녀를 겁탈했다.

어느 날 밤 도둑 둘이 조도필 집 담을 넘었다.

도둑도 사람을 보면 도망치는 양성이 있고 주인에게 칼을 들이대는 악성이 있다.

조도필 목에 칼을 댄 두 놈은 악성 중에서도 극악성이다.

돈과 금은붙이를 모두 털더니 조도필을 묶어놓고 한놈은 부인을,

또 한놈은 혼약을 한 열여덟 딸을 겁탈했다.
이튿날 우물가에 한 많은 딸의 나막신 두 짝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