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34) - 빨간 모과

우현 띵호와 2021. 9. 22. 02:56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34) - 빨간 모과   

열네살 맏딸 맹참봉에게 보내고
몸값으로 논 다섯마지기 받은 신서방
어느날 느닷없이 끌려가
사또 앞에 섰는데
“금붙이 훔쳐 달아난
딸의 행방을 이실직고하라”

동지섣달 짧은 해가 오늘따라 왜 이리 긴가.

어둠살이 사방 천지를 시커멓게 내리덮자

마침내 신 서방이 열네 살 맏딸을 데리고 맹 참봉 사랑방을 찾았다.

희미한 호롱불 아래서 신 서방은 말없이 한숨만 쉬고,

맹 참봉은 뻐끔뻐끔 연초만 태우고,

신 서방 딸 분이는 방구석에 돌아앉아 눈물만 쏟는다.

“참봉 어른, 잘 부탁드립니다. 어린 것이 아직 철이 없어서….”

맹 참봉 사랑방을 나온 신 서방은 주막집에 가서 정신을 잃도록 술을 퍼마셨다.

이튿날, 해가 중천에 올랐을 때

신 서방은 술이 덜 깬 걸음으로 맹 참봉을 찾아갔다.

“참봉 어른, 약조하신 땅문서를 받으러 왔습니다.”

맹 참봉이 다락에서 땅문서를 꺼내 신 서방에게 건넸다.

노끈을 풀어 땅문서를 보던 신 서방이

“다섯 마지기밖에 안 되네요. 나머지 다섯 마지기는…?” 하자

맹 참봉 입에서 오장육부를 뒤집는 말이 흘러나왔다.

“자네 딸은 숫처녀가 아니여. 다섯 마지기도 과한 거여.”

성질 같아서는 목침을 들어 맹가 놈 대갈통을 박살내고 싶었지만

신 서방은 꾹 참고 말했다.

“아직 열네 살밖에 안된 어린앱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러자 맹 참봉이 화를 내며 “증거가 있어, 증거가!

요 위에 피 한 방울 찍히지 않았어!” 한다.

쫓겨나다시피 맹 참봉 집을 나온 신 서방은 또 주막으로 가 통곡했다.

며칠 후 다시 맹 참봉을 찾아간 신 서방은 하인들에게 주먹찜질까지 당했다.

맏딸을 팔아먹고 제값도 못 받아 술독에 빠져 사는 신 서방은

그날도 곯아떨어져 날이 밝아도 일어날 줄 모르는데,

포졸들이 들이닥쳐 온 집을 뒤지더니 오랏줄로

신 서방을 묶어 동헌으로 끌고 가 사또 앞에 세웠다.

“네 이놈, 도망친 네 딸년의 행방을 이실직고하지 못할까!”

사또의 찌렁찌렁한 불호령에 놀란 신 서방이

이리저리 둘러보니 맹 참봉이 보였다.

“맹 참봉은 저놈 앞에서 다시 한번 경위를 설명하라!”

사또의 호통에 맹 참봉이 답했다.

“소인이 산 너머 상가에 문상을 하고 삼경이 되어서야 집에 왔더니

제 방의 다락 자물통이 뽑혀져 나가고 다락 속 금붙이가 몽땅 없어지고

저 놈의 딸년도 사라졌습니다. 제 아비와 내통을 한 게 틀림없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신 서방은 곤장 스무 대를 맞고 엉덩이가 피투성이가 되어

옥에 갇혔다. 사또는 포졸들을 풀어 나루터 길목을 지키고

고갯마루 외통길을 막아 온 고을을 뒤져도 도망간 분이를 찾지 못했다.

봄이 왔을 때 신 서방은 면회 온 마누라로부터 기막힌 소식을 들었다.

맹 참봉이 분이 몸값으로 줬던 논 다섯 마지기를 도로 빼앗았다는 것이다.

혀를 깨물고 죽고 싶어도 어린 자식들이 눈에 아른거려 죽을 수도 없었다.

찌는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을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고을 사람들이 맹 참봉네 담 밖으로 모여들었다.

“세상 살다가 빨간 모과는 처음 보네.” “길조여, 흉조여?”

소문은 사또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빨간 모과? 모과가 빨갛다?” 사또가 갑자기 고함쳤다. “여봐라!”

사또는 육방관속을 대동하고 맹 참봉네 사랑방 앞의

아름드리 모과나무 앞에 가 “모과나무 밑을 파렷다!”하고 불호령을 내렸다.

치마끈으로 목을 맨 분이의 시체는 원한에 사무쳐 눈을 뜬 채 썩지도 않았다.

목에 감긴 치마끈 끝엔 뽑힌 자물통이 달려 있었다.

맹 참봉은 곤장 서른 대를 맞고 피와 똥이 범벅이 되어

옥에 들어가 신 서방이 앉았던 자리를 차지했다.

사또는 맹 참봉의 논밭 백 마지기를 신 서방에게 주고,

양지바른 곳에 분이를 묻어주었다.

그리고 혼을 달래는 굿판을 벌이고 위령탑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