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84) <산삼>

우현 띵호와 2021. 10. 5. 01:58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84) <산삼>

친구인 우직한 덕팔이와 영악한 재기

어느날 산에서 약초를 찾던 중

재기가 산삼을 발견하는데…

앞뒷집에 사는 덕팔이와 재기는 둘도 없는 불알친구다.

그러나 두녀석의 노는 꼴은 영 딴판이다.

덕팔이는 우직하고 느릿느릿한 데 반해 재기는 영악스럽고 약삭빠르다.
어느 날, 두녀석은 저잣거리로 놀러 나갔다.

그런데 재기가 똥이 마려워 길가 풀숲으로 들어간 사이 천천히 길을 걷던

덕팔이의 두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길에 엽전이 점점이 떨어진 것이다.

어느 부자 첨지가 말을 타고 가면서 전대가 풀어진 것을 몰랐던 모양이다.

모두 열여섯냥이나 되었다.
덕팔은 그대로 길가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때 풀숲에서 나온 재기가 “왜 그러고 있느냐?”고 물었다.

덕팔이 왈 “돈을 흘린 사람이 틀림없이 되돌아올 테니 여기서 기다려야 해.”
“얼마나 주웠는데?”
“열여섯냥.”
재기는 입을 쩍 벌리며 채근했다. “이 바보야! 빨리 도망치자.”
재기가 막무가내로 덕팔이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덕팔이는 꿈쩍도 안 했다.

결국 해가 저물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덕팔이는 주운 돈의 반인

여덟냥을 재기 손에 쥐여 주었다.
열여섯살이 되자 두녀석은 돈벌이에 눈을 떠 약초꾼이 되었다.

깊은 산속에 들어가 하수오를 캐고, 두충이며 음양곽을 채취해

약재상에 내다팔아 받은 돈을 반반씩 나눠 가졌다.
어느 날, 서로 저만치 떨어져 약초를 찾던 중 재기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겨우내 낙엽 속에 웅크리고 있던 산삼이 삐죽이 올라온 것이다.

지난해 자랐던 쭉정이엔 아직도 새빨간 열매가 달려 있었다.

재기의 가슴은 쿵쾅쿵쾅 방망이질을 쳤다.

산에서 산삼을 발견하면 골짜기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심봤다!”를 외쳐야 하는데

영악스러운 재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곳에서 서른걸음쯤 내려오다가 약초자루를 안고

넘어져 떼굴떼굴 구르며 “사람 살려!”라고 소리쳤다.
“재기야, 재기야! 정신차려 인마!”
덕팔이가 달려와 개울에 처박혀 정신을 잃은 재기를 흔들어 깨웠다.

덕팔이는 약초자루를 메고 발목이 삔 재기를 부축해 산에서 내려왔다.

이튿날 아침, 덕팔이가 재기 집을 찾아갔으나 재기는 없었다.

재기 어머니에게 “어디 갔느냐”고 물으니 퉁명스럽게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그날 저녁나절부터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재기가 간밤 꿈에 나타난 산신령이 가르쳐 준 대로 산에 올라

백년생 산삼을 열두뿌리나 캤다는 것이다.
재기네 부자는 바위에서 이끼를 뜯어 산삼을 덮고 젖은 광목으로

정성껏 싸서 다래끼에 담아 저잣거리에 있는 약재상으로 갔다.
약재상이 산삼을 풀어 보더니 감탄해 손을 떨었다.

“내 생전에 수많은 산삼을 봤지만 이렇게 큰 산삼은 처음 보네.”
약재상은 시동을 보내 의원을 모셔 왔다.

흰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의원도 산삼 열두뿌리를 보더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재기 부자는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대를 이어 내려오던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됐다는 감격에

어깨까지 들썩이며 흐느꼈다.
속병을 앓는 권 참사가 달려오고,

폐병을 앓는 천석꾼 부자 황 참봉이 하인의 등에 업혀 왔다.

새로 첩을 얻은 홍 진사도 달려왔다.

산삼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마침내 논 서른여섯마지기를 주겠다는 황 참봉에게 낙찰되었다.

논문서를 재기 아버지에게 넘기고 산삼 다래끼를 받은 황 참봉은

퀭한 눈으로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감격에 겨워 말했다.
“우선 생으로 한뿌리 먹어야겠소.”
의원이 젖은 광목을 풀고 이끼에 싸인 산삼 한뿌리를 꺼내다가 뒤로 나자빠졌다.

잎은 시들고 산삼뿌리는 푸석푸석 썩어서 떨어진 것이다.

방금까지 노란 산삼 새싹이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고,

길게 뻗은 산삼뿌리도 싱싱했는데….

갑자기 이럴 수가! 논문서를 도로 빼앗긴 재기 부자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