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97) <떠돌이 노름꾼

우현 띵호와 2021. 10. 6. 19:19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97) <떠돌이 노름꾼>

노름꾼들에게서 판돈 빼앗은 만득이

기생집 색시의 미모에 반해 그만…

나루터 주막집 구석진 방에 노름판이 걸쭉하게 벌어졌다.

담배 연기 자욱한 방에 희미하게 피운 관솔불 하나는

사람 얼굴도 구분하지 못할 지경인데 노름꾼들은

용하게도 골패를 잘 읽는다.

보부상에 홍삼 도매상, 돈놀이 최부자, 유기전 오부자….

옹기종기 모여 따그닥 따그닥 골패소리에

엽전 소리만 쨍그랑거린다.

그때 ‘꽈다당~’ 갑자기 골방 문이 부서지며 덩치 큰 포졸 하나가

육모방망이를 휘두르며 들이닥쳤다.

“모두 엎드려! 대갈통이 박살 나기 전에!”
벽력 같은 고함에 노름꾼들은 모두 머리를 양손으로 감싼 채

방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엉덩이를 세웠다.

“내일 해가 뜨면 모두 동헌으로 모이렷다!”
포졸은 판돈을 몽땅 쓸어 자루에 담더니

문을 박차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배 끊어진 지가 언젠데 포졸은 나루터로 달려갔다.

한 척뿐인 나룻배와 뱃사공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둑놈 잡아라~.”
수상한 낌새를 알아챈 노름꾼들이 달려 나왔지만

벌써 쪽배는 가짜 포졸을 싣고 장마 뒤끝의 싯누런 황토물이

넘실거리는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렇게 강을 건너간 가짜 포졸은 솥뚜껑만 한 손으로

엽전을 덥석 집어 뱃사공에게 건넨 뒤 노를 빼앗아 강에 던져 버렸다.

떠돌이 노름꾼, 가짜 포졸 만득이는 성큼성큼 어둠 속을 걸어갔다.

전대는 넘쳐나고 거사(巨事) 전에 간덩이를 키우려고

벌컥 벌컥 마셨던 술이 그제야 얼근히 취했다.

삼십리를 걸어 객줏집에 다다른 만득이는 노름판에서

털어온 돈을 펼쳤다가 놀라서 까무러칠 뻔했다.

엄청난 돈이었다. 고향에 가서 기와집을 짓고, 논밭을 사고,

참한 색시를 얻으리라는 단꿈을 꿨다.

이튿날, 만득이는 우선 말 한필을 샀다.

이어 통영갓과 한산세모시 바지저고리에 비단 두루마기를 사 입었다.

원래 좋은 허우대라 사대부 집안의 맏아들 모양새가 되었다.

그 길로 말을 타고 칠십리나 달려 진주땅에 다다랐다.

만득이는 술을 실컷 마시고 고기도 실컷 먹고

촉석루 아래 남강에서 뱃놀이도 했다.

그렇지만 딱 하나가 모자랐다.

어둠살이 내리자 만득은 추월관 기생집에 들어갔다.

기생집 주모가 상다리가 휘어져라 요리상을 차려

내오고 색시 하나를 데려왔다.

순간, 만득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선녀인가, 인간인가, 구미호인가.’
주모가 때를 놓치지 않고 만득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약주 드실 때 술잔만 올리면 스무냥,

머리를 올려주려면 이천냥을 주셔야 합니다.”

색시에게 술잔만 받기로 하고 술을 마시는데

보면 볼수록 예쁘기 짝이 없다.

행동거지도 조신해 내친김에 머리를 올려주기로 했다.

뒷방에 금침을 깔아놓고 만득이 촛불을 끈 뒤 옷을 훌훌 벗었다.

그런데 색시가 한 무릎을 세우고

얼굴을 묻은 채 하염없이 흐느끼는 것이다.

만득이는 술이 확 깼다. 촛불을 다시 켜고 색시에게 사연을 물었더니,

사화(士禍·조선시대에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게 몰려 참혹한

화를 입던 일)에 휩쓸려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귀양을 갔단다.

오빠 둘은 옥살이를 하고 여동생은 이모집에 숨어서

아버지와 오빠의 옥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색시는 별 도리가 없어 정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었지만

천오백냥에 이곳 진주 기생집으로 팔려왔다는 것.

만득이는 벗었던 옷을 다시 입고 색시의 손목 한번 잡지 않은 채

밤새도록 마주 앉아 얘기만 나눴다.

동이 트자 만득이는 이천냥을 색시 치마폭에 던져놓고 고향 산청으로 떠났다.

그래도 아직 수중에 오백냥이 남아 있었다.

그후 조정이 한바탕 들끓더니 사화가 반전되었다.

이듬해 봄, 만득이가 고향 땅에서 ‘이랴~’ 쟁기질을 하고 있는데

말과 가마를 타고 그 색시 일가족이 내려왔다.

몸을 더럽히지 않은 색시가 곧장 한양에 올라가

약혼자를 찾았지만 벌써 다른 규수와 혼례를 올린 후였다.

그렇게 찾아온 색시와 만득이는 산청땅이 떠들썩하게 혼례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