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조선정판사 위폐 사건

우현 띵호와 2022. 12. 20. 21:46

조선정판사 위폐 사건

애국시민 여러분!
조선정판사 위폐 사건을 아십니까? 
박지원의 조부가 일으킨 반란사건이랍니다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은 이글 아래쪽에 상세히 기록하겠습니다)
조선 정판사라는 출판사 사장 간첩 박낙종이 박헌영의 지령을 받아

공산정권 수립을 위한 자금 및 선전활동비를 조달하고,

남한 경제를 교란시킬 목적으로 1945년 10월 20일부터

6회에 걸쳐 거액 (당시화폐 : 1,200만원)의 위조 지폐를

발행한 반란 사건 입니다.

 

남로당 총책이자 정판사 사건을 기획한 박헌영이 북으로 

도피하게 된 엄청나게 큰 반역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일으킨 박낙종은 박지원의 조부이며 그의 가계는 

아래와 같이 원조 빨갱이 집안입니다.
1. 조부 간첩 박낙종 - 위폐사건으로 목포교도소에서 사형.
2. 부친 간첩 박종식
    - 해방후 남로당 진도 책임자로 진도 경찰에 의해 사살
3. 삼촌 간첩 박종국
    - 고군면 인민위원회 부 위원장.
    - 9.28 수복 후 화가난 진도주민들에 의해 맞아  죽음.
4. 아들 박지원 - 신분을 감추기위해 미국으로 이민.
    박지원의 가족사는 위와 같습니다
    3대를 이어온 대역죄인의 자식이 지금도 대한민국 정치를

    쥐락펴락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찌 보고만 있을수 있겠습니까?
    죄값을 치르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남로당 박헌영의 지령을 받고 경향신문사의 전신인 정판사를

    차려놓고 위조 지폐를 찍어 공산당 활동 자금을댄 간첩 박낙종의

    친손자가 박지원이라는 사실을 국민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박낙종, 이관술, 송언필,김창선등 주범에게는 무기징역, 

    나머지는 10년~ 15년 형이 선고되어, 복역 하다가 6.25가 터지면서 

    일제히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그중에서 박지원의 조부 박낙종은 목포교도소에서 사형을 당했습니다. 
    박지원의 고향은 진도가 고향이며, 그 일가 대부분이 좌익 활동을 했고, 

    박지원은 조부 박낙종이 사형당한 목포에서 국회의원이 되어

    열심히 친북 활동에 매진 중입니다
   

    박지원의 아버지 박종식은 김대중 전대통령과 목포상고 동문입니다.
    해방후 박종식은 남로당 진도책임자가되고
    삼촌 박종국은 고군면 인민의원회 부위원 장이 됩니다.
    박종식, 박종국은 1948년 10월 23일 경찰에 수배되고,

    그들은 지방 유격대장으로 한국 경찰들을 무수히 죽였습니다.

 

    그들의 은신처 지리산 피아골이 국군에 함락 당하자

    신안으로 피신하다 진도경찰서 김기일, 곽순배 형사와 총격전 끝에

    마지막 까지 "인민공화국'만세"를 부르다 사살되었습니다.
   

    박지원 삼촌 박종국과 고모는 북한군 앞잡이로 진도 젊은이들을 잡아

    북괴군에 징용 시키다  9.28 서울 수복후 전세가 역전되자 도망 치던 중,

    화난 진도 주민들에게 붙잡혀 돌과 미제 도끼 자루에 맞아 비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진도군 무공수훈자 회장 최기남씨 증언)
    박지원은 자신의 가족사가 극좌익 짓을 하다가 비참하게 죽은 것을

    숨기기 위해서. 고향에서 호적을 파고 신분을 세탁하여 미국에서 가발사업,

    포주 노릇을 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그러다 전두환 정권때 줄을대서 전 정권을 옹호하며 굽실 거리다가 
    김대중이 야당 대표로 미국을 방문을 할때 충성을 맹세하고

    눈도장을 받아 김대중의 충복이 됩니다.
    김대중이 집권하자 김대중 친북(간첩)행태에 반발하는 김경재의 

    자리를 차고 들어가 김대중 오른팔 노릇을 하며 국민과 합의도 없이 

    국민 혈세 6천억을 비롯 천문학적인 금액을 홍콩 김정일 차명계좌로

    대북 송금을 하는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송금 과정에서 떡고물을 챙겨 감옥까지 갔다 옴)

 

    2000년에는 남한 언론인 46명을 데리고 방북하여 만족조 씨뿌리기(의심)와

    김정일에게 충성맹세를 하게한 장본인 이기도 합니다
    이런자가 지금도 야당 지도자로 둔갑하여 우리나라 핵심 국정원, 법조계,

    언론, 방송, 군대, 노조, 국회까지 장악하여 이 나라를 악마의 소굴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자는 김대중 비서실장 하기전부터 곳곳에 심어 놓은 심복들의 정보력을

    바탕으로 여야를 넘나들며 국정을 쥐락 펴락 어지럽히고,

    종북 활동을 하고 있으니 이 나라 꼴이 어찌 되겠습니까?
    그러니 이 모양이 된 것 아니겠습니까?

    3대에 걸쳐 역적질하고 있는 박지원을 반드시 처단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더욱 기가 막힌 사실은
    박지원이 독립유공자의 자손으로 둔갑하여
    건국포장을 받았고 월 80만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판사 사건을 일으킨 골수 공산 간첩인 박낙청의 손자이자 좌익 사범으로

    처형된 박종식의 아들 박지원이 건국포장을 받고 독립유공자가 된 기막힌

    사연은 이렇습니다 
    항간에 알려진 건 DJ 정부가 줬다고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김영삼 정부가 맞습니다.

    (국가보훈처에 확인한 결과 건국포장을 받은 햇수는 1993년)
    박지원이 김영삼을 줄기차게 공격하자 뒤에서 타협이 이뤄졌고,

    그게 건국포장 수여로 낙착을 봤다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금도 박지원은 독립유공자의 신분으로 월 80만 원을 수령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본래 박지원은 DJ의 수하로 들어가기 전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접근했는데,

    당시 의원 공천을 받는데 실패했습니다. 
    그것도 좌익사범 아버지 박종식 탓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렇다면 박지원에게 건국포장은 집안 세탁과 본인의 입신양명을 위한

    최선의 카드였던 셈입니다.
    참으로 하늘이 놀라고 땅이 진동할 경천동지할 노릇 아닙니까?
    하늘에 계신 독립유공자분들이 통곡할 일입니다
    국가보훈처는 박지원이 건국포장을 받은 사유와 박지원의 조부의 행적을

    낱낱히 국민앞에 밝혀야 합니다.
    그래서 문재인은 지난 8.15행사때 독립 유공자의 자손을 3대까지 우대하고

    먹여 살리겠다고 했는지 묻고 싶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고 손이 떨려 더 이상 글을 쓸수가 없습니다.
    오호통재라! 
    긴글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선 정판사 ( 위폐)사건 내용

남한에 공산정권 수립을 위하여 당의 자금 및

선전활동비를 조달하고 경제를 교란시킬 목적이었다.

1945년 8·15광복 이후 여러 정치세력들이 난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공산당은 일제가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던 근택(近澤)빌딩을

접수하여 조선정판사로 개칭하고, 이를 위조지폐 발행장소로 사용하였다.

 

그들은 재정난으로 인하여 당 활동자금 조달방책을 모색하고 있던 중

조선정판사에 지폐원판이 있다는 것을 알고 당원인 박낙종 사장에게

그들의 계획을 알렸다.

 

박낙종은 같은 곳에서 근무하던 공산당원 김창선(金昌善)에게

당 재정부장 이관술(李觀述)과 당 중앙집행위원이며 해방일보사

사장인 권오직(權五稷)의 지령을 전하였다.

 

1945년 10월 20일서울시 소공동 74번지에 있는 근택빌딩 내

조선정판사 사장실에서 사장 박낙종, 서무과장 송언필(宋彦弼),

재무과장 박정상(朴鼎相), 기술과장 김창선, 평판기술공 정명환(鄭明煥),

창고계주임 박창근(朴昌根) 등이 비밀리에 모여 위조지폐를 인쇄,

공산당에 제공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날 오후 7시 공장종업원들이 퇴근한 뒤 김창선이

평판과장으로 있을 때 절취, 보관하고 있던 100원권 원판(징크판) 등으로

모두 16 차례에 걸쳐 위조지폐 1200만 원을 위조하여 이관술에게 제공,

공산당의 활동비로 전액 사용하게 하였다.

 

출처 불명의 위조지폐가 나돌아 경제를 혼란시키자 경찰은 수사에

착수하여 김창선이 지폐원판 1매를 서울오프셋인쇄소윤석현(尹奭鉉)에게

보관시킨 것을 탐지하고 범인체포에 나서 1946년 5월 4일과 5일

중부경찰서(당시 本町경찰서) 형사대가 이재원 등 일당 7명을 체포하였다.

 

이어 그들의 자백에 의하여 5월 7일 공산당원 16명 중

간부 3명을 제외한  14명을 체포하였다.

공산당측에서는 5월 17일 성명을 발표하여 구속된 정판사 직원 14명을

공산당원이 아니라고 변명하였다.

 

7월 29일 서울지방법원 제14호 법정에서 양원일(梁元一)판사 주심,

최영환(崔榮煥)·김정렬(金貞烈) 두 판사의 배석으로 제1회 공판이 개정되었다.

 

공판은 30여 회 열렸는데, 공산당은 사건을 담당한 판사 및 조재천(曺在千)·

김홍섭(金洪燮) 두 담당검사들을 협박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판 때 방청석은 물론 판검사석과 서기석을 점령하고 테러단까지

동원하여 공판정을 수라장으로 만들었다.

 

특히, 제1회 공판 때에는 새벽부터 정동 일대에서 수백 명의 공산당원들이

「항쟁가」를 부르며 소란을 피워 기마대를 비롯한 수백 명의 경관이 동원되었다.

 

사태의 악화를 우려하여 경무부장 조병옥(趙炳玉), 수도청장 장택상(張澤相)

두 사람이 법정에 나타나자 방청석에 있던 공산당원들은 소란을 피워

법정은 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또, 개정되자마자 10여 명에 달하는 좌익 변호사들의 재판 기피로 폐정되었다.

그러나 그 해 11월 28일의 선고공판에서 이관술·박낙종·송언필·김창선 등

주범에게는 무기징역, 이광범·박상근·정명환에게는 징역 15년,

김상선·홍계훈·김우용에게는 징역 10년이 각각 선고되었다.

 

당시 공산당에서는 『해방일보』등의 좌익신문을 통하여 이 사건을 전혀

허위날조된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사건을 당시 우익지들이 주장하던 ‘조선공산당위폐사건’이라 하지 않고

‘조선정판사사건’이라 칭한 것은 국민들의 선입견을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5월 16일 조선공산당 기관지인 『해방일보』는

정간되고 말았다.

 

또, 미군정 당국은 공산당의 불법행동에 강력한 조처를 취하게 되어

공산당은 지하로 잠입하여 파괴공작을 벌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