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

생령도탄(生靈塗炭)

우현 띵호와 2021. 7. 20. 23:31

생령도탄(生靈塗炭)
백성이 진흙이나 숯불에 떨어진 것과 같은

고통이라는 뜻으로, 대단한 곤란과 괴로움에

빠짐을 비유한 말이며, 생령(生靈)은 백성을 뜻한다.
生 : 날 생(生/0) 靈 : 신령 령(雨/16) 塗 : 칠할 도(土/10)
炭 : 숯 탄(火/5)
(유의어)
도탄지고(塗炭之苦)
출전 : 진서(晉書) 卷115 전진재기(前秦載記) 부비(苻丕)
백성들의 생활이 몹시 어려워 고통스러운 지경을 말할 때

도탄(塗炭)에 빠졌다고 말한다.

칠한다는 뜻의 도(塗)는 진흙탕을 말하고,

숯 탄(炭)은 숯불 속에 떨어진 것 같은

괴로움을 준다는 의미다.

바로 도탄지고(塗炭之苦)다.

폭군 걸왕(桀王)의 학정에 신음하는 백성을

탕왕(湯王)이 혁명으로 상(商)나라를 건국하며

구한 내용이 서경(書經)에 실린 데서 비롯됐다.

똑 같은 말로 살아있는 넋(生靈),

즉 백성들의 도탄에 빠지는 듯한 고통이란

이 성어는 출처가 다르다.

창생도탄(蒼生塗炭)이라고도 한다.

중국 이십사사(二十四史)의 하나인 진서(晉書)에

전진(前秦)의 좌승상이었던 왕영(王永)이 왕명을

하달하는 통지문에서 사용됐다.

이 시대를 즈음한 정세를 간단히 보자.

삼국시대(三國時代) 이후 사마염(司馬炎)이

265년에 세운 서진(西晉)은 서로 왕권을 다투는

16년간의 八王(팔왕)의 난으로 쇠퇴했다.

사마예(司馬睿)가 동진(東晋)을 건국하여

명맥을 보존할 때 화북(華北)지방에는

이민족이 세운 오호(五胡) 십륙국이 명멸했다.

이중 티베트족인 저족(氐族)의 전진은 3대

부견(苻堅)이 집권했을 때 가장 융성했다.

우리와는 372년 고구려(高句麗)에 순도(順道)를 보내

불교를 전한 인연도 있다.

하지만 부견은 국력을 믿고 너무 자주 전쟁을 일으켜

쇠퇴를 가져왔고, 385년 후연(後燕)과 후진(後秦)의

공격을 받아 최후를 맞이했다.

이 때 부견의 아들 부비(苻丕)를 왕으로 세우고

혼란을 수습한 사람이 왕영이었다.

그는 각 지역의 군대에 연합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선제 부견이 적들에 피살되고 '수도가 함락돼

온 나라가 어지러우며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다

(神州蕭條 生靈塗炭)'면서 결전 준비를 시켰다.

이렇게 독려했어도 전진은 쇠락의 길을 걸어

394년 후진에 의해 멸망했다.

신주(神州)는 중국을 자칭하는 이름으로

유인 우주선에도 갖다 붙였다.

옛날 폭정을 일삼던 왕조시대나 세금을 긁어

가렴주구(苛斂誅求)하던 때의 백성들은 아니라 해도

오늘날 모두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지는 못한다.

국민소득은 이전에 비해 까마득하게 올랐지만

빈부의 격차는 벌어지기만 한다.

잘 사는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는 저소득 빈민의 생활은

상대적인 현대의 도탄의 고통일 수 있다.
⏹ 생령도탄(生靈塗炭)
동진시대, 북방의 전진(前秦)은 국력이 강한 나라였으나,

국왕 부견(苻堅)이 자주 전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국력이 쇠퇴하였다.

특히 비수(沘水)에서의 전투를 치른 후에는

국력이 급격히 약해졌다.

서기 385년, 후연(後燕)과 후진(後秦)은

전진(前秦)을 공격하여, 도읍인 장안(長安)이 포위되고,

부견은 오장산(五將山)으로 후퇴하였다가 후진의

군사들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때 전진의 유주(幽州) 자사(刺史) 왕영(王永)은,

업성(鄴城)에 주둔하며 수비를 하고 있던 부견의 아들

부비(苻丕)를 진양(晉陽)으로 모셔다가 왕으로 세웠다.

부비는 왕위에 오른 후, 왕영을 좌승상에 임명하였다.

왕영은 후진과 후연에 맞서기 위해 각 지역의 전진 군대에

연합하라는 명령을 하달하고, 좌승상 명의의 통지문을 발행하였다.

통지문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였다.

"선제(先帝) 부견께서는 적들에게 죽임을 당하셨으며,

우리의 수도 장안은 적들의 수중에 함락되어 온 나라가

매우 어지러우며, 백성들의 생활은 마치 진흙수렁과

숯불 속에 있는 듯하여(神州蕭條, 生靈塗炭),

그 형편이 몹시 위급하다. 각 지역의 관리들은

이 통지문을 받은 후, 가능한 한 신속하게 군대를

진양으로 보내어 적들과 결전을 준비하도록 하여라."

왕영이 이렇게 노력을 해보았지만,

후진의 군대가 너무 강하였으므로 그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전진은 점차 쇠락의 길을 걷다가 394년 결국 후진에 의해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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