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20) <각시탈>

우현 띵호와 2021. 10. 9. 02:10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20) <각시탈>

여자보기를 돌같이 하던 신관 사또

고을 열녀에게 효부상을 주었는데…

젊은 신관 사또가 강원도 영월에 부임했다.

그 이름은 공덕수. 나이는 아직 서른에 못 미쳤지만

신언서판(身言書判)에 모자람이 없었다.

게다가 후덕한 인품에 인의(仁義)를 중히 여겨 한점 부끄럼도 없었다.

공 사또는 처자식을 한양에 두고 홀로 내려와 동헌에서 홀아비 생활을 했다.

이를 알고 육방관속이 진수성찬을 차려 질펀하게 연회를 베풀자

공 사또는 휘어진 상다리를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리더니

갖은 아양을 떠는 수청 기생의 손목 한번 안 잡고 연회를 파했다.

이후 모든 관리들은 그달 녹봉에서 연회비를 공제한 걸 알고선 아연실색했다.

정월 대보름이 코앞에 닥친 어느 날, 공 사또가 이방을 불렀다.
“대보름날 동헌 마당에서 윷놀이와 널뛰기를 한다지?”
“네. 매년 해오던 전통이라….”
“그날 효부 열녀상도 주게 상 받을 사람을 찾아보렷다.”
행사를 취소하랄까 봐 조마조마하던 이방이 냉큼 대답한다. 

“나으리, 찾아볼 필요도 없습니다.

이 초시네 며느리 빼고선 효부 열녀를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온 고을에 소문이 자자합니다.”

이 초시의 3대 독자 외아들한테 시집온 열일곱 홍실이는

반년도 안 돼 청상과부가 되었다.

새신랑이 죽고 나서 입덧을 하더니 유복자를 낳아 그댁의 대를 이었다.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시부모가 손자를 보자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온 듯

손자를 품속에 안고 살았다.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던 홍실이도 아들에게 젖을 물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며느리가 아이를 업고 야반도주라도 할세라

이 초시 내외는 밤새 아이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다

날이 새면 홍실이 품에서 손자를 뺏어 갔다.

손자가 젖을 떼자 이 초시 내외는 밤에도 데리고 잤다.

손자는 제 어미보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더 좋아했다.

그렇지만 홍실이는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다.

빠듯한 살림살이에도 어디서 돈이 생겼는지 툭하면 고깃국을 끓여 올리고,

이 초시의 비단 마고자를 짓고 시어머니의 공단 장옷도 마련했다.

정월 대보름, 영월고을 백성들 앞에서 사또는 홍실이에게

효부상을 내리고 열녀비도 동헌 밖에 세웠다.

그런데 인의와 예절을 중히 여기는 공 사또 귀에 묘한 소문이 들어왔다.

점잖은 이 진사와 술잔을 나누며 시를 짓는데

그가 이렇게 전하는 것이 아닌가.

“사또 나으리! 동강 주막에 가끔씩 돈 많은 거상이나

부잣집 도령이 들러 하룻밤 객고를 푸는데 그 상대가 주모나 기생,

유녀(遊女)가 아니랍니다.

시문에도 능하고 말과 행동에 품위가 있어 억만금을 주더라도

천박한 남정네에게는 몸을 주지 않는답니다.

은밀하게 이틀 전에 주모에게 예약을 해야 되고.

이상한 것은, 그 여자가 각시탈을 썼답니다.

이불 속에서도 탈을 써 남자가 벗기려 들면 은장도를 빼든다네요.

호사가들이 지어낸 헛소문인지…. 허허허.”

정선 금광에서 노다지를 찾았다는 광산주가 이틀 전 주모에게

예약을 하고 금침 깔린 안방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삼경(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이 가까워지는 늦은 밤 주모가 들어왔다.

“나으리, 오래 기다렸습니다요. 왔습니다.

약조하신 대로 절대 탈을 벗기면 안 됩니다.”

장옷으로 두 눈만 남기고 온몸을 가린 여인이 들어와 장옷을 벗었다.

소문대로 웃는 모습의 각시탈을 쓴 여인이 붉은 매화가 수놓인

비단치마에 연녹색 저고리를 우아하게 입고 살포시 앉았다.

“낭자도 한잔 하구려.”
여인이 뒤돌아앉아 탈을 올리고 술 한잔을 비웠다.

“저도 대인께 약주 한잔 올리겠습니다.”
목소리가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소리다.

“치마에 수놓인 홍매에 나비가 날아들 것 같구려.”
젊은 금광주와 각시탈은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나누며

매화 시도 한구절을 주면 대구절을 척척 받아넘겼다.

술상을 치운 뒤 각시탈이 저고리 옷고름을 풀고 치마를 벗자

촛불 역광에 망사속치마 속의 여인네 몸매가 고혹스럽게 드러났다.

금광주가 ‘후~’ 촛불을 끄고 눌러 썼던 갓을 벗었다.

일진광풍에 몰려온 먹구름이 폭우를 쏟고 천둥번개에 하늘과 땅이 붙어버렸다.

이튿날, 봄볕이 내리쬐는 동헌 마루 의자에서 코까지 골며 낮잠을 자고 난

공 사또가 혼자 중얼거렸다.
“맞아, 틀림없어. 아무리 얼굴을 가렸지만 효부상을 탔던 그 여인이야.”
시부모님 아침상을 차려주고 안방에 드러누운 홍실이는

“금광주? 아니야, 사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