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21) <개마고원 산적>

우현 띵호와 2021. 10. 9. 02:10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21) <개마고원 산적>

친정 신행길에 오른 새신부,

가마째 산적에 납치되었는데…

함경도 갑산(甲山) 사또가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길은 요란했다.

말 다섯필 잔등엔 호피, 여우가죽, 수달피, 말린 웅담, 호골, 산삼,

하수오 등등 값비싼 개마고원 특산품들이 바리바리 실리고

금은보화와 묵직한 전대도 실렸다.

칼을 차고 창을 든 포졸 넷이 호위하고 집사와 하인 셋이 따르는

긴 행렬이 화동령 협곡을 지날 때였다.

우르르 쾅쾅, 절벽 위에서 바위가 연달아 떨어지며 화살이 빗발치자

이임 사또 행렬은 혼비백산했다.

이튿날 동헌에서 육방 관속이 나오고 보부상에 호사가들이

발걸음을 멈춰 화동령 협곡은 장터처럼 법석거렸다.

사또 행렬은 구름처럼 흩어져 그림자조차 안 보였다.

오직 사또만이 발가벗긴 채 소나무가지에 대롱대롱 거꾸로 매달려 있었는데,

불뚝이 배엔 ‘돼지’라고 적혀 있었다.

뻔히 개마고원에 터를 잡은 산적들의 소행임을 알면서도

누구 하나 토벌에 나서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갑산 감영의 병방이 포졸 40~50명을 데리고 나타났지만

토벌 시늉만 하다가 내려갔다.

몇년 전 평양에서 관군 1000여명이 몰려와 개마고원에 군막을 치고

장기전을 펼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살을 에는 강추위에 동상을 입어

발가락을 자르는 관군들이 늘어나고,

눈이 가슴팍까지 쌓이자 얼어 죽고 굶어 죽는 사람까지 속출해

아무 소득 없이 하산하고 말았다.

어느 봄날, 혼례를 올린 지 두달된 새신부가 갑산 친정으로

신행길에 올랐다가 혜문령에서 산적들을 만났다.

수행 하인과 가마꾼들은 뿔뿔이 도망가고 열여덟살 어린 신부는

가마째 산적들에게 납치됐다.

신부의 시댁은 혜산 최고 갑부 심 참봉네로, 신랑은 열일곱살 삼대 독자다.

노다지 광산을 차고 앉아 떵떵거리며 살았지만 대대로 자손이 귀했다.

신부의 친정아버지 장연은 무관으로 국경수비대인 혜산진성에서

병마첨절제사로 나라의 녹을 먹다가 퇴임 후 고향에서 조용히 살고 있었다. 장

연은 혜산에 있을 때 심 참봉과 어울렸던 인연으로 사돈이 된 것이다.

친정 신행길에 새신부가 산적에게 납치됐으니 양쪽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그렇지만 갑산 동헌에서는 신임 사또가 병방을 시켜 포졸들을 데리고

산적을 잡으러 가는 흉내만 낼 뿐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혜산 갑부인 시집에서도 그저 한숨만 쉬더니 일년이 지나자

새장가를 들었다는 소문이 사돈댁까지 들려왔다. 

개마고원에도 늦게나마 꽃피고 새우는 봄이 왔다.

나이 지긋한 부모와 장성한 아들 둘, 한가족이 말 세마리에 이불이며 솥 등

살림살이를 잔뜩 싣고와 산자락 주인 없는 땅에 터를 잡았다.

남정네들은 모두 텁수룩하게 수염을 길렀다.

띄엄띄엄 떨어져 사는 개마고원 화전민들은 이들을 털보네라고 불렀다.

털보네 삼부자는 말을 타고 개마고원 구석구석을 훑고 다니며

토끼·꿩·노루·멧돼지를 사냥해 이웃에게도 나눠주며 인심을 얻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떼의 산적들이 털보네 집에 들이닥쳐

일가족을 밧줄로 묶었다.

“너희는 개마고원 산적들의 산채를 정탐하러 온 세작(간첩)들이렷다.”
관솔 불빛에 칼날이 번쩍이자 이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니오.

우리는 그저 사냥꾼이오”라며 부인했다.

그때 젊은 산적 하나가 앞으로 나서 포박당해 꿇어앉은 털보네

삼부자를 유심히 살피더니 알은척했다.

“갑산서 따님을 찾으러 올라오신 장자 연자 어른이시죠?”
이경(밤 9시부터 11시 사이)이 안돼 납치됐던 새신부를 데려왔다.

이들 가족은 서로 얼싸안고 눈물바다를 이뤘다.

허우대가 멀쑥한 젊은 산적이 장연에게 큰절을 올렸다.

스물다섯살 차웅은 일찍이 무과에 급제했으나 뇌물을 안 바쳐

임용이 안 되는지라 신문고를 쳤다가 오히려 옥에 갇혀 일년을 살았다.

이들은 나라가 썩었다고 울분을 토하며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
“산채는 어디 있소?”
“산채는 없습니다. 화전민 너와집이 모두 산채이지요.”

산적두목 차웅과 장연의 딸이 혼례 날짜를 잡았다.

새신부가 친정어머니에게 귓속말을 했다.

“혜산 심 참봉 삼대독자는 고자야.

두달 동안 내 옷고름 한번 안 풀었어. 비록 납치돼 왔지만

차 서방은 오늘까지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어.

엄마, 나는 아직 숫처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