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130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15)운명의 윷을 던지다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15)운명의 윷을 던지다 가난한 집안의 셋째딸 언년이 김대감집 딸 몸종으로 들어가 결혼하자고 협박하는 산적두목에 아씨를 대신해 시집 가게 되는데… 강원 강릉에 딸 일곱, 아들 하나를 둔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셋째 딸 언년이는 입 하나 덜겠다고 열두살 때 김 대감 댁 몸종으로 들어갔다. 귀염상에 눈치 빠른 언년이는 두살 위인 김 대감 외동딸의 몸종이 되어 입속의 혀처럼 아씨를 받들었다. 네해가 지나 아씨가 한양의 홍 판서 아들에게 시집을 가자 언년이도 몸종으로 따라갔다. 이듬해 친정 생각으로 아씨가 눈물을 보이자 신랑은 말을 타고 아씨는 가마를 타고 신행길에 올랐다. 말고삐를 잡고 등짐을 지고 걸어가는 하인들 틈에서 언년이의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걷는 것만 같았다. 몇 날 며칠을 걸어..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⒀산적 두목이 된 남자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⒀산적 두목이 된 남자 과거에 낙방해 낙향하다가 산적에게 붙잡힌 지서방 병든 두목 대신 산적 두목이 되어 악행 일삼는 무림사 승려들에게 보물함을 바치며 술잔치를 벌였는데… 과거에 낙방해 피골이 상접한 지 서방이 낙향하다가 또 낭패를 당한다. 고린내 나는 버선을 쑤셔 넣은 단봇짐 하나 달랑 메고 솔티재를 넘다가 시퍼런 칼을 든 산적 둘을 만난 것이다. 단봇짐을 펴던 산적이 코를 막고 지 서방 목에 칼을 갖다 댔다. 지 서방이 와들와들 떨며 말했다. “과…과거에 낙방하고 노…노잣돈이 떨어져 두끼나 굶었소이다.” “과거를 봤다?” 산적 둘은 지 서방을 데리고 토끼길을 따라 돌아돌아 산채로 갔다. 낙락장송에 둘러싸인 산채엔 크고 작은 움막집이 여럿이고 텁석부리 산적들과 함께 아녀자들도 보였다..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12)깨엿, 곰취 그리고 봉선화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12)깨엿, 곰취 그리고 봉선화 부인을 끔찍이 사랑했던 유 초시 봄이면 그녀가 좋아한 봉선화 심고 곰취 뜯으러 깊은 산 헤매며 장에 가선 깨엿 가장 먼저 사 어느날 외출하고 돌아온 뒤 첩살림 차렸단 말 남기고 집나갔는데… 젊었을 적부터 유 초시는 부인 회천댁을 끔찍이 생각해 우물에서 손수 물을 길어다 부엌에 갖다주고, 동지섣달이면 얼음장을 깨고 빨래하는 부인이 안쓰러워 개울 옆에 솥을 걸고 장작불을 때 물을 데웠다. 봄이 되면 회천댁이 좋아하는 곰취를 뜯으러 깊은 산을 헤매고 봉선화 모종을 구해다 담 밑에 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장날이 되면 유 초시는 회천댁이 좋아하는 검은 깨엿을 가장 먼저 사서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이러니 회천댁은 동네 여인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다. “단 ..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⑻의적 도적선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⑻의적 도적선 신출귀몰한 ‘도적선’ 부잣집 재물을 훔쳐 가난한 이들 도와줘 장안에는 온통 도적선(盜積善) 얘기뿐이다. 며칠 전에 종로포목 왕거상 집이 털렸고, 어젯밤엔 민대감 집이 털렸다. 오늘 밤엔 누구 집이 털릴까? 이날 이때껏 털린 집은 손가락이 아프도록 꼽고 꼽아도 모자란다. 부잣집과 세도가는 도적선에게 감쪽같이 털리고도 이를 발설하지 않지만 금세 장안에 알려지기 마련이다. 한양 골목길 몇군데에 이렇게 방이 나붙는다. “소인 적선은 민웅한 대감 집을 털었도다. 열돈이 넘는 금송아지는 무슨 벼슬을 팔아서 받은 것이며 주먹만 한 비취는 누구한테 받은 것인가?” 신출귀몰 도적선은 재물을 훔쳐서 나올 때 꼭 ‘積善(적선)’이라는 글자를 남겼다. 착한 일을 행하라는 꾸지람일 수도 있고,..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⑺자연의 이치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⑺자연의 이치 시집가서 1년도 못 채우고 과부돼 친정으로 돌아온 소월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는데 어느 밤 보쌈당해 사라진 후… 소월의 병은 깊어져만 가고 그 에미 운산댁의 수심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운산댁 속이 터지는 것은 무남독녀 외동딸이 시름시름 앓는데도 무슨 병인지 이름조차 모르겠고, 용하다는 의원 다 불러와 온갖 처방 받아 정성 들여 약을 달여 먹여도 차도가 없는 데다, 딸년이란 게 초당의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제 에미하고 얼굴을 맞대려 하지 않는 것이다. 소월의 팔자는 시집갈 때부터 틀어졌다. 고을이 떠들썩하게 부잣집 훤칠한 신랑한테 시집가 부러움을 한몸에 받은 것도 잠깐, 일년도 못 채우고 덜컥 신랑이 급사하자 신랑 잡아먹은 것이라고 시집의 눈초리가 싸늘해져 보따리 하나 옆..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⑹석녀(石女)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⑹석녀(石女) 시집온 무실댁 애가 들어서지 않자 눈물 흘리며 쫓겨나 어디론가… 어느 날 장에 간 시어머니 인사하는 무실댁을 보고 놀라는데… 무실댁은 시어머니 손에 이끌려 고을에서 가장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갔다. 흰 수염이 한자나 늘어진 의원이 무실댁의 손목을 잡고 진맥을 하더니 냉이 심하다고 한소리를 한 뒤 혀를 찼다. 한참이나 기다려 탕재를 열두첩이나 받아들고 의원을 나온 무실댁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시어머니 뒤를 따라 집으로 왔다. 시어머니가 이를 악물고 “이 탕재값이 얼만 줄 알기나 하는 기여? 이걸 먹고도 소식이 없어 봐라!” 하며 일침을 가한다. 무실댁이 시집온 지 이태가 지났지만 애가 들어서지 않아 애를 태우는 것이다. 시어머니는 별짓을 다했다. 닭 소리도 들리지 않는 꼭두..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⑷최참봉과 산돼지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⑷최참봉과 산돼지 악질 최참봉이 수퇘지 잡아죽이자 암산돼지가 선친 묘 파헤쳐 성난 최참봉 복수한다며 새끼있는 암퇘지까지 잡아죽였는데… 청산골이 발칵 뒤집어졌다. 간밤에 최참봉의 선친 묘가 파헤쳐져 백골이 흩어진 것이다. 산돼지의 짓이다. 동네 사람들은 크게 놀랐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7년 전에 이승을 하직한 최참봉의 선친은 생전에 남 못할 짓을 수없이 저지르고도 눈도 깜짝하지 않은 악덕 지주였다. 보릿고개에 굶어 죽어가는 동네 사람들에게 장리쌀을 놓아 목줄을 걸고 있던 몇마지기 밭뙈기를 송두리째 빼앗고, 그나마 논밭조차 없는 집은 어린 딸을 데려와 이불 속 노리개로 삼았다. 소작농의 마누라를 겁탈해 그녀가 목을 매어 자살하기도 했다. 이런 악행에도 탈이 나지 않은 것은 온 동네..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⑶나루터 주막에서 생긴일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⑶나루터 주막에서 생긴일 석양이 떨어지며 강물은 새빨갛게 물들었다. 어둠살이 스멀스멀 내려앉는 나루터 주막은 길손들로 들끓고 부엌에서는 밥 뜸 드는 김이 허옇게 쏟아지고 마당가 가마솥엔 쇠고깃국이 설설 끓는다. 내일 채거리장을 보러 온 장돌뱅이들, 대처로 나가려는 길손들, 뱃길이 끊겨 발걸음을 멈춘 나그네들은 저녁상을 기다리며 끼리끼리 혹은 외따로 툇마루에 걸터앉거나 마당 한복판 평상에 앉거나 마당가 멍석에 퍼질러 막걸리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때 검은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눈만 빠끔히 내민 여인이 사뿐사뿐 남정네 냄새 가득한 주막으로 들어서더니 장옷을 벗어 안방에 던져놓고 팔소매를 걷어붙인 채 부엌으로 들어갔다. 주모에게 인사할 사이도 없이 상을 차리느라 두손이 보이지 않는다. ..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⑵세겹 쇠상자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⑵세겹 쇠상자 어스름이 내려앉은 산골짝, 다 쓰러져 가는 외딴 초가삼간에 추적추적 봄비가 내린다. 삼년째 이엉을 못 갈아 덮어 검게 썩은 지붕에서 빗물이 새 안방은 물바다가 되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쉬어 빠진 짠지 하나에 나물죽을 먹던 변 노인이 절름거리는 다리로 뒤꼍에 가더니 깨어진 옹기를 들고 와 새는 빗물을 받았다. 변 노인은 하염없이 낙수를 보다가 제 신세가 서러워 어깨를 들썩이며 서럽게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소쩍, 소쩍-. 딸 하나 아들 넷, 다섯 남매를 낳고 부인이 이승을 하직하자 변 서방은 핏덩어리 막내아들을 안고 심 봉사처럼 이집저집 젖동냥을 다니며 온 정성을 다해 자식들을 키웠다. 매파가 들락날락했지만 자식들이 계모에게 구박을 받을세라 새장가도 가지 않았다. 막내가..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⑴거위 목숨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⑴거위 목숨 흑진주 도둑으로 몰린 선비 “거위도 곁에 묶어주시오” 한자락 저녁 햇살을 잡고 있는 산허리를 돌아 초췌한 선비가 때 묻은 두루막 자락을 여미며 양지마을에 발을 들여놓았다. 찾아간 주막에 객들이 꽉 차서 주모가 가르쳐 준 대로 이 진사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 진사는 천석꾼 부자에, 비록 급제는 못했지만 출중한 문재에, 문객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했다. 그 집 사랑방은 손님이 끊일 날이 없었다. 오가는 선비들이 이 진사와 술잔을 나누며 담소하다가 때로는 자고 가기도 하는 곳이었다. 나그네 선비가 이 진사네 대문을 두드려 주막집 사정을 조심스럽게 얘기하자 이 진사가 반갑게 맞아들였다. 사랑방에 마주 앉아 몇 마디 얘기를 나눠본즉, 의관은 허술하지만 선비의 학식이 이만저만이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