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130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96선친의 일기장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96선친의 일기장 인정 많고 점잖아 존경 받던 김 진사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노망 들어겨울밤 부인의 묘 찾아가다 죽는데… 아들 김 초시, 아버지 장례 치르고유품 정리하다 일기장을 발견하곤 김 진사네 집안은 웃음꽃이 떠날 날이 없었다. 천석꾼 부자는 아니지만 머슴 셋을 두고 문전옥답 백여 마지기 농사를 지으면 곳간이 그득해 보릿고개엔 양식 떨어진 가난한 이웃에 적선도 베풀었다. 동네에 서당이 없어 손자 셋과 동네 아이들이 사랑방에 모이면 김 진사는 훈장 노릇도 했다. 인정 많고 점잖아 동네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김 진사의 서른두 살 아들 김 초시는 제 아비를 빼쏘아 행동거지가 반듯하고 매사에 사려 깊고 성품이 착했다. 사람들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95)<백송(白松)>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95) 천석꾼 부자 백 진사…폐병 걸린 7대 독자와 시들어가는 백송 걱정에 한숨 그해 봄, 아들이 색주집을 드나들고 백송 가지마다 솔방울 달리는데… 백 진사는 새벽닭이 울 때까지 이 걱정 저 걱정으로 잠을 못 이뤘다. 그러다가 홑적삼만 걸친 채 밖으로 나와 구름 걷힌 하늘에 오랜만에 두둥실 떠오른 만월(보름달)을 쳐다보고 간청했다. “천지신명이시여, 소인을 데려가고 두 목숨을 살려주소서.” 천석꾼 부자 백 진사가 제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두 생명은 무엇인가? 하나는 7대 독자인 아들 윤석이고, 다른 하나는 백송(白松)이다. 열일곱살 윤석이는 폐병이 깊어 기침이 끊이질 않고, 밤이면 요강에 검붉은 피를 토한다. 파리한 얼굴에 두 눈은 쑥 들어가고 광대뼈는 솟아올랐다. 키는 삐죽하..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94)<황토 개울물>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94) 아버님의 묘소를 다녀온 이판윤 그날 밤 어머니와 함께 또 다른 산소를 찾아가 절을 올리는데 서른셋 젊은 나이에 판윤(조선시대 한성부의 으뜸 벼슬)으로 봉직하는 이서붕이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왔다. 사또와 육방관속이 마중 나와 떠들썩해질까 봐 어둠살이 내릴 때 평상복 차림으로 말고삐를 잡은 하인 한 사람만 데리고 고향집에 들어갔다. 도착하자마자 홀로 지내시는 모친에게 큰절을 올렸다. “바쁜 공무를 접어두고 어떻게 하경했는고?” “어머님 문안도 드리고 아버님 묘소도 찾으려고 윤허를 받아 내려왔습니다.” 병풍을 등 뒤로 보료에 꼿꼿이 앉아 계시지만 어머니 얼굴의 주름은 더 늘었고, 머리엔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았다. 어머니는 찬모를 제쳐두고 손수 부엌에 나가 아들이 어릴 적부터 좋..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93) <돌아야 돈이다>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93) 사계절 행락객 발길 이어지면서 산촌마을 ‘청록골’에는 돈이 도는데 느닷없이 역병이 돈다는 소문에… 청록골은 스물한 집이 사는 조그만 산촌마을이다. 첩첩산중에 파묻혀 있는 작은 마을이지만 아주 외딴곳은 아니다. 청록골은 유람마을이다. 금강산·설악산만큼은 아니지만 수직으로 솟아오른 화강암 바위가 하늘을 찌르고 절벽 사이사이 갈라진 틈으로 소나무가 뿌리를 박아 분재처럼 매달렸다. 이 계곡 저 계곡에서 모인 물은 제법 큰물을 이뤄 돌고 돌아 내리다가 폭포가 되어 절벽 앞에 떨어지니 커다란 소(沼)가 생겼다. 절벽 반대편에는 백사장이 제법 참하게 펼쳐져 여름이면 차양을 치고 물놀이며 뱃놀이를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뿐이 아니다. 봄엔 진달래·철쭉이 온 마을을 꽃동산으로 만들었다. ..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92)<겁탈>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92) 외딴집에 이사온 대장장이 ‘곽꺽정’ 연장 팔려고 나간 비내리던 밤 말 못하는 마누라만 있는 집에… 마을 변두리, 냇가 산자락에 외딴 빈집으로 젊은 대장장이 신랑 각시가 이사를 왔다. 빈 외양간에 풀무를 앉히고 대장일을 시작하더니, 장날이 되자 장터 구석에 칼이며 호미를 펼쳐 좌판을 벌였다. 그때 왈패 세녀석이 자릿세를 받으려다 시비가 붙었다. 구경꾼들이 빙 둘러 모여들었는데 일은 싱겁게 끝났다. ‘후다닥 퍽퍽-’ 순식간에 왈패 세놈이 질퍽한 장터 바닥에 여덟 팔자로 뻗어버린 것이다. 이 일로 대장장이 곽가는 ‘곽꺽정’으로 불리며 저잣거리에서 일약 영웅이 되었다. 그는 이따금 주막에 들러 대폿잔을 기울였는데, 다른 장사꾼이 모여들어 합석해도 그저 껄껄 웃기만 할 뿐 신상에 ..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91)<공생(共生) 공멸(共滅>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91) 앉은뱅이를 목마 태운 당달봉사 두사람은 서로에게 눈과 발이 돼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데… 저잣거리 앉은뱅이가 두팔을 발 삼아 이 가게 저 가게를 호시탐탐 기웃거렸다. 진열대 아래 납작 엎드렸다가 가게 주인이 한눈파는 사이 얼른 한손을 올려 떡도 훔치고 참외도 훔쳤다. 그러다가 주인에게 들키는 날이면 돼지오줌통 축구공처럼 발에 차여 떼굴떼굴 굴러 나가떨어 진다. 공짜로 배를 채울 수 있는 잔칫집도 빨리 가야 얻어먹는다. 앉은뱅이가 두팔로 아장아장 달려가봐야 품바꾼들이 이를 쑤시고 나올 때 들어가니 허드렛일 하는 여편네들에게 구박만 잔뜩 먹기 일쑤이다. 어느 날, 맨 꼴찌로 들어간 이진사네 잔칫집에서 겸상을 받게 되었는데 마주앉은 사람은 당달봉사다. 가끔 만나는 사이라 젊은..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90)<흔들리는 너와집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90) 과거시험에 아홉번 낙방한 송백기 용소에 몸던지려는 찰나에 어디선가 풍덩 소리가… 달이 네개다. 검푸른 밤하늘에 하나, 용소에 또 하나, 백기의 두눈에 고인 눈물 속에도 달이 하나씩 어른거린다. ‘스물두살 송백기는 이렇게 생을 마감하는구나. 친구들과 어울려 술 한잔 못 마셔보고, 여자 손목 한번 못 만져보고, 이렇게….’ 백기가 용소에 뛰어들려는 순간 ‘풍덩’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눈물을 닦고 건너편을 봤더니 누군가 용소에 먼저 뛰어들어 휘도는 물살에 감겨 옷자락이 맴도는 게 아닌가. 백기는 자신도 모르게 뛰어들어 옷자락을 붙잡고 소용돌이와 사투를 벌였다. 죽을 힘을 다해 나뭇가지를 잡아 용소 밖으로 빠져 나와 물 속으로 뛰어든 사람을 보니 산발한 여인이다. 입에 입을 ..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90) 극락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90) 극락 몽촌댁은 동네의 보물덩어리다. 시부모 살아생전에는 얼마나 잘 모셨는지 단옷날 고을 원님으로부터 효부상으로 비단 세필을 받기도 했다. 또 동네일이라면 집안 살림을 접어두고라도 앞장섰다. 핏줄도 아닌데 혼자 사는 할머니가 딱하다며 죽을 쒀 나르고 가마솥에 물을 한솥 데워 목욕시키는 것은 다반사다. 동네로 들어오는 외나무다리가 흔들린다고 남편과 둘이서 온종일 말뚝을 박는가 하면, 남의 집 길흉사엔 새벽부터 밤늦도록 제집 큰일처럼 척척 일을 처리했다. 그뿐 아니라 일 잘하면 박색이라는데, 몽촌댁은 채홍사가 봤다면 궁궐로 이끌려 갈 만큼 천하일색이었다. 남편 박 서방도 마음씨가 무던한데다 육척 장신에 어깨가 떡 벌어지고 허우대가 멀쩡했다. 또 힘이 장사라 씨름판에서 황소 몇마리..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89)<한눈에 반하다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89) 단옷날 그네여왕 춘화 그녀에게 한눈에 반했다는 씨름장사와 혼례를 치르고 첫날밤 펑펑 우는데… “지화자~ 지화자 좋다. 녹음방창(綠陰方暢)에 새울음 좋고 지화자~.” 기생 일곱이 뽑아내는 가락에 단오 분위기는 한껏 부풀어 올랐다. 가림막 아래 멍석을 깔고 사또와 육방관속, 고을 유지들은 술잔 돌리기에 여념이 없고 드넓은 아랑천 모래밭은 이골저골 열아홉마을에서 모인 남녀노소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천변의 회나무 그넷줄은 노랑저고리 분홍치마를 매달아 올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씨름판의 함성은 천지를 뒤흔들었다. 기나긴 오월 햇살이 비스듬히 누울 즈음, 씨름판도 결판이 났고 그네도 여왕이 탄생했다. 오매골 노첨지의 셋째딸, 춘화는 올해도 그네 여왕이 되어 사또로부터 비단 세필을 ..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88)<화장(火葬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88) 부모없이 외가에서 자란 유일문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외할머니 유언에 봉화 춘양 땅 만석봉 바위굴로 갔는데… 젊은 나이에 예문관에 들어가 왕의 총애를 받던 유일문이 어느 날 슬픈 전갈을 받았다. 한평생 자신을 키우는 데 갖은 정성을 바친 외할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졌다는 것. 왕의 윤허를 받아 곧장 말을 타고 강원도 영월로 향했다. 자꾸 눈물이 흘러 산천이 물속에 잠긴 듯 어른거렸다. 어려서부터 외가에서 자란 유일문은 부모에 대한 기억이 어렴풋하다. 서당에 들어가 을 배울 무렵, 부모님이 사무치게 그리워 외할머니에게 진실을 알려 달라고 울면서 매달렸다. 얼굴을 치마폭에 묻고 한참을 우신 외할머니는 “네가 세살 때 엄마는 열병에 걸려 죽고, 아버지는 집을 나가 이때껏 소식조차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