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130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11)<노세작>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11) 꾀가 많고 남속이는 재주 뛰어난 노참봉 밤길에 열녀상 받은 과부 집에서 한 남정네가 몰래 나가는걸 보는데… 노참봉을 사람들은 노세작이라고 부른다. 자그마한 키에 몸에는 군더더기 살이 없어 나이 오십줄에 들어섰지만 날렵하기가 다람쥐다. 키보다 훨씬 높은 담도 손만 닿으면 훌쩍 뛰어넘는다. 사실 노세작의 장기는 몸뚱이에 있지 않고 머릿속에 있다. 그의 머리에서 쏟아지는 꾀는 나와도 나와도 끝이 없는 화수분이다. 눈은 쏙 들어가고 광대뼈는 톡 튀어나온 깡마른 얼굴이지만 냄새 맡는 데는 삽살개 저리 가라다. 항상 눈을 깔고 다니지만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고, 십리 밖 여인네 옷 벗는 소리도 들린다는 토끼귀를 가졌다. 문제는 그 빼어난 몸과 마음의 재주를 나쁜 쪽으로만 써먹는 데 있..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109)배과수원 주인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109)배과수원 주인 아이들 배서리에 몹시 화가난 오생원 송사해도 안되자 팻말을 세우는데… 오 생원이 하루에도 몇번씩 얼굴을 마주하는 한동네 사는 세사람을 발고(發告), 사또 앞에서 송사가 벌어졌다. 그들의 죄목은 서당 다니는 자식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개구쟁이들이 밤에 오 생원의 배 과수원에 들어가 서리를 하다가 잡힌 탓이다. 애들은 종아리가 찢어지도록 회초리 타작을 당했고, 그 부모들은 배값으로 열닷냥씩 내라는 소송이었다. 사또가 오 생원에게 물었다. “밤에 과수원에 들어온 학동들을 잡았을 때 그 녀석들이 배를 몇개씩 땄는고?” 오 생원이 “어흠 어흠” 헛기침을 하더니 대답했다. “그때는 한개밖에 안 땄지만 그간 수없이 도둑맞은 게 모두 그들 짓이라 유추할 수밖에..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06) <풍천장어>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06) 악덕업주 팽영감의 장어집에서 일하다 갑자기 사라진 만득이와 천득이 형제 어느날 선운장어집을 여는데… 선운사의 새빨간 단풍잎이 밤새 가을비를 맞고 우수수 떨어져 계곡물에 실려 급하게, 천천히 떠내려오다가 고창에 다다르면 제법 넉넉한 개울에 뜨게 된다. 남루한 차림의 대여섯살쯤 되는 녀석이 풍천가에 쪼그리고 앉아 떠내려오는 단풍잎을 하나씩 고사리손으로 건져 올려 양지바른 바위에 착착 붙였다. 그때 개울가 모래 둔덕을 넘어온 열두서너살 먹은 소년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소맷자락 속에서 무엇인가 꺼내 단풍잎을 줍는 아이에게 주자 한점을 입에 쏙 넣었다. “형아도 먹어라.” 바로 그 순간, 두눈을 부릅뜬 영감님이 둔덕 위로 불쑥 솟아나 “야, 이놈!”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러..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05)<혼처>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05) 송진사 무남독녀 청매 열여섯 되자 문지방 닳도록 매파들 들락날락 혼처 세군데로 압축됐는데 청매는 날마다 눈물바람… 송 진사의 무남독녀 청매가 이팔청춘 열여섯이 되자 꽃봉오리처럼 화사하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꽃사슴처럼 서글서글한 눈, 오뚝 선 콧날, 앵두 입술, 흑단 머리, 백옥 피부에 가슴은 봉긋이 솟아오르고, 복숭아 엉덩이는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송 진사네 문지방이 닳도록 매파들이 들락날락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청매의 인물뿐 아니라 송 진사네도 천석꾼은 아니어도 오륙백석은 족히 하는 부자인데다 육대조가 승지를 지낸 뼈대 있는 집안이다. 내로라하는 신랑감들이 수단 좋은 매파들을 송 진사 집으로 보냈다. 매파들을 접견하는 사람은 청매의 할머니다. 어느 날, 이 초시네 ..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03) <무등산 수박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03) 사돈에게 귀한 수박 한통 받은 이초시 먹지 않고 장인어른께 보내는데… 아침저녁으로 오싹한 한기에 옷깃을 여미게 하는 백로도 지나 추석이 가까워지는 어느 날, 이 초시는 깜짝 놀랄 선물을 받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광주 무등산 자락 운림골에 사는 사돈이 커다란 무등산수박을 보내온 것이다. 임금님 진상품인 무등산수박을 먹어 보기는커녕 난생처음 구경하는 터라 이 초시는 가슴이 쿵쿵 뛰었다. 다른 식구들도 무등산수박을 둘러싸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게도 며느리를 구박하던 시어머니, 그러니 이 초시 마누라가 며느리를 부르는 목소리부터 비단결처럼 고와졌다. “아가! 설거지는 내가 하마. 여기 와서 네 친정아버지가 보낸 무등산수박 좀 보거라.” 이 초시 마누라는 그러면서 벌떡 일어섰..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02)<작은 고추가 맵다>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02) 작고 말랐지만 깡이 있는 지생원 당나귀 고삐를 감나무에 묶었는데 덩치 큰 젊은 선비가 말을 끌고와… 붓장수 지 생원은 환갑이 지났건만 아직도 한달이면 스무날은 손수 붓을 만들고, 열흘은 붓을 팔러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다. 겨울이면 강원도 영월로, 정선으로 돌아다니며 족제비, 담비, 수달피를 사냥꾼으로부터 사들였다. 담비 목털로 세필(細筆) 붓을 만들고 족제비 꼬리로 중필 붓을 만들었다. 강원도를 쏘다니고, 만든 붓을 팔려고 이곳저곳을 다닐 때 지 생원의 발이 되고 동무가 되는 것은 당나귀다. 지 생원은 오척 단신에 피골은 상접해 바람이 세차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생김새다. 하지만 깡이 있어 남에게 지는 법이 없다. 평소 안면 있는 장돌뱅이가 “지 생원! 나무 잡아, 바람..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01)<우우상박도>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01) 그림에 관심 많은 만석꾼 권참사 청나라 화상에게 그림 한점을 어렵게 구하는데… 권 참사는 강경의 만석꾼 부자로, 아흔아홉칸 고래 등 같은 집에 하인·하녀가 스물다섯이다. 대문 밖 황금바다처럼 펼쳐진 가을 들판, 강경평야에 권 참사 논둑을 밟지 않고선 백걸음도 걸을 수 없다. 권 참사는 영악스러운 작은 처남을 집사로 둔 덕분에 집안 살림살이는 강 건너 불 보듯 한다. 그러고선 허구한 날 선비들과 어울리고 환쟁이(화가)들과 화상(畵商·그림장수)들을 만난다. 드넓은 사랑방은 언제나 손님들로 북적이고, 그 뒤로 딸린 객방에는 각양각색의 손님들이 유숙한다. 권 참사네 집은 잔칫집처럼 손님들이 들끓어 부엌엔 찬모가 여덟이나 되지만 한시도 쉴 틈이 없다. 권 참사는 글을 잘해 선비들과..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99)<노총각 심마니>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99) 색줏집을 때려 부숴 곤장 맞고 술 취해 인사불성이 된 ‘덕배’ 재를 넘어 가는 길에 한 여인이… 하룻밤 옥살이 끝에 동헌 앞마당에서 곤장 열대를 맞고 관아를 빠져나온 덕배는 곧장 주막으로 들어가 탁배기(막걸리)를 퍼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었다. 덕배는 노총각 심마니다. 조실부모하고 어릴적부터 약초꾼인 당숙을 따라 이산저산을 헤매고 다녔다. 그런데 당숙이 몸져눕자 외톨이 심마니가 되어 가끔 현몽을 꿔 산삼을 캐면 한의원에 팔아 목돈을 챙겼다. 노총각 덕배는 6척 장신에 어깨가 떡 벌어져 풍채가 좋다. 이따금 산삼을 캐다가 부러진 것들은 자신이 와그작 먹어버리고, 허구한 날 비호처럼 산을 타다보니 허벅지는 한아름이요, 장딴지는 옹기만 하다. 하지만 밤이 되어도 넘치는 힘을 쏟을 곳..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98)<소금장수 곽서방>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98) 노름판에서 모든걸 잃은 곽서방 저수지에 몸 던지려는 그때 물 위로 한여인이… 소금장수 곽서방은 노름판에 잘못 끼어들어 돈을 다 잃었다. 만회하려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함께 다니던 당나귀도 헐값에 넘겨 그 돈으로 또 골패를 잡았지만, 그마저도 이경(밤 9~11시 사이)을 넘기지 못한 채 빈손이 되었다. 가을 추수하면 받기로 하고 이집 저집 깔아 놓은 외상 소금값 치부책도 반값에 넘기고 또 붙었지만 새벽닭이 울 때 다 털렸다. 막걸리 한 호리병을 나팔 불고 노름판을 나와 마당 구석에서 순식간에 날려버린 당나귀를 안고 어깨를 들썩였다. 장마 뒤끝이라 서산 위에 그믐달이 애처롭게 걸려 있었다. 소금창고를 짓고 객주를 차리려던 포부도, 참한 색시를 얻어 장가가려던 바람도 모두 물거..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97) <떠돌이 노름꾼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97) 노름꾼들에게서 판돈 빼앗은 만득이 기생집 색시의 미모에 반해 그만… 나루터 주막집 구석진 방에 노름판이 걸쭉하게 벌어졌다. 담배 연기 자욱한 방에 희미하게 피운 관솔불 하나는 사람 얼굴도 구분하지 못할 지경인데 노름꾼들은 용하게도 골패를 잘 읽는다. 보부상에 홍삼 도매상, 돈놀이 최부자, 유기전 오부자…. 옹기종기 모여 따그닥 따그닥 골패소리에 엽전 소리만 쨍그랑거린다. 그때 ‘꽈다당~’ 갑자기 골방 문이 부서지며 덩치 큰 포졸 하나가 육모방망이를 휘두르며 들이닥쳤다. “모두 엎드려! 대갈통이 박살 나기 전에!” 벽력 같은 고함에 노름꾼들은 모두 머리를 양손으로 감싼 채 방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엉덩이를 세웠다. “내일 해가 뜨면 모두 동헌으로 모이렷다!” 포졸은 판돈을 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