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130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87)<곳간열쇠>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87) 기품있고 우아한 현덕부인 남편이 기생과 살림차려 집 나가자 곳간을 열고 쌀을 퍼내… 현덕부인은 우아한 기품이 향기처럼 온몸에서 우러난다. 말이 별로 없지만 언제나 자상한 미소를 띠고 있다. 이날 이때껏 하인과 하녀들이 잘못을 저질러도 매운 질책 한번 하지 않고, 이웃들과 말다툼 한번 하지 않았다. 그러니 남편 우 진사에게도 말대꾸 한번 하지 않았다. 시간 날 때면 여덟폭 병풍에 둘러싸여 사군자를 치는 게 현덕부인의 낙이다. 남편 우 진사도 점잖은 선비다. 우 진사는 현덕부인을 외경하지만 딱 한가지 불만이 있었다. 늦은 밤 사랑방에서 글을 읽다가 살며시 안마당을 건너 헛기침을 하며 안방에 들어가 촛불을 끄고 현덕부인의 옷고름을 풀면 그때부터 부인은 얼어붙는다. 혼례를 올린 ..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86) <노름꾼>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86) 노름에 빠져 가산 탕진한 젊은이 타향 떠돌다 집에 돌아오니…마누라는 도망가고 노모는 타계 노름 끊겠다며 손가락 아홉개 자르고, 절에 들어가 삭발까지 했는데… 탁발을 마친 노스님이 절로 돌아가다가 고갯마루 바위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때 눈 아래 펼쳐진 괴상한 풍경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자 높이도 안되는 초라한 봉분 앞에서 삐쩍 마른 젊은이가 허리에 찬 수건을 펼쳐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젊은이는 그것을 놓고 큰절을 세번 하더니 묘 앞에 풀썩 쓰러져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더니 곧 너무나 섧게 울었다. 구곡간장이 끊어질 듯 젊은이의 통곡소리는 쉼없이 이어졌다. 노스님이 조용히 다가갔다. “똑똑 또르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 으악!” 노스님은 깜짝 놀라서 엉덩방아를 ..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84) <산삼>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84) 친구인 우직한 덕팔이와 영악한 재기 어느날 산에서 약초를 찾던 중 재기가 산삼을 발견하는데… 앞뒷집에 사는 덕팔이와 재기는 둘도 없는 불알친구다. 그러나 두녀석의 노는 꼴은 영 딴판이다. 덕팔이는 우직하고 느릿느릿한 데 반해 재기는 영악스럽고 약삭빠르다. 어느 날, 두녀석은 저잣거리로 놀러 나갔다. 그런데 재기가 똥이 마려워 길가 풀숲으로 들어간 사이 천천히 길을 걷던 덕팔이의 두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길에 엽전이 점점이 떨어진 것이다. 어느 부자 첨지가 말을 타고 가면서 전대가 풀어진 것을 몰랐던 모양이다. 모두 열여섯냥이나 되었다. 덕팔은 그대로 길가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때 풀숲에서 나온 재기가 “왜 그러고 있느냐?”고 물었다. 덕팔이 왈 “돈을 흘린 사람이 틀림없이..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83)사기꾼 골탕먹이기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83)사기꾼 골탕먹이기 가난하지만 법 없이도 사는 착한 농사꾼 안서방이 장에 가서 눈을 질끈 감고 배 세 개와 꿀 한 단지를 샀다. 심한 고뿔로 몸져 누운 아내에게 꿀을 넣은 배숙을 해 먹이기 위해서다. 아내를 위해 먹고 싶은 막걸리 한 잔 안 마시고 비싼 꿀을 사왔는데 이럴 수가... 위에만 살짝 꿀이고 그 아래는 전부 조청이 아닌가. 안서방은 가짜 꿀단지를 안고 20리 길을 달려 장으로 갔지만 그 꿀장수는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다음 장날 아침, 안서방은 다시 장으로 갔다. 눈을 부릅뜨고 온 장터를 샅샅이 뒤진 끝에 마침내 주막에서 나오는 그 사기꾼을 잡았다. “여보시오, 지난번에 당신이 판 건 가짜 꿀이오. 당장 내 돈 돌려주시오.” 덩치 큰 사기꾼은 술 냄새를 풍기며 우습..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84)큰스님의 큰절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84)큰스님의 큰절 계모에게 학대받은 덕수와 덕순 남매 지나가던 큰스님이 덕수를 보고 갑자기 큰절을 하는데… 갓 장수 임 서방은 홀아비다. 부자는 아니더라도 보릿고개 걱정 없이 조신한 마누라와 떡두꺼비 같은 아들 하나를 두고 살갑게 살았는데, 그 마누라가 둘째 애를 낳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임 서방은 장사도 접은 채 세 살배기 아들을 둘러업고 핏덩어리 둘째 딸아이는 포대기에 싸안고 이 집 저 집, 강 건너 남의 동네까지 다니면서 젖동냥 하는 게 일이 됐다. 삼년을 그렇게 살다가 매파 할미 중매로 과부와 재혼을 하게 됐다. 과부는 딸 셋을 데리고 들어왔다. 식구가 일곱으로 늘어나자 쌀독이 쑥쑥 줄고, 닳아 없어지는 신발도 불감당이라 임 서방은 거의 4년 만에 갓 장수를 다시 하지 ..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83)<홍매>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83) 죽마고우 이초시와 한진사…붉은 매화 핀 날 사돈 맺어 이초시, 아들이 열병으로 세상 뜨자 청상과부 며느리 친정으로 보내는데… 이 초시와 한 진사는 죽마고우다. 어릴 적부터 같은 서당에 다니며 둘도 없는 단짝이 돼 말다툼 한번 없이 형제처럼 친하게 지냈다. 어른이 돼서도 두사람의 우정은 관포지교에 못지않았다. 장가를 가서 이 초시는 아들 둘을 두고, 한 진사는 아들 하나 딸 셋을 두었다. 어느 날 이 초시는 하인을 보내 강 건너 사는 한 진사를 불렀다. 한 진사가 이 초시네 하인에게 물었다. “붉은 매화가 피었더냐?” 한 진사는 겨우내 잘 익은 감로주를 하인의 손에 들려 외나무다리를 건넜다. 이 초시 별채 앞에 서 있는 고매(古梅) 나무에 홍매화 꽃망울이 톡톡 터지기 시작했..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83)장군의 꿈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83)장군의 꿈 전쟁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이성계 어느날 산양 잡는 꿈을 꾸는데… 고려 말, 나라가 어수선한 틈을 타 왜구가 배를 타고 건너와 우리나라 이 고을 저 고을을 약탈하며 괴롭혔다. 왜구의 폐해가 극심해지자 우리 조정에서는 군대를 파견해 그 들을 제압하려 했으나 번번이 패전만 거듭했다. 설상가상, 아키바츠라는 걸출한 일본 장수가 1380년 왜구를 이끌고 우리나라에 상륙, 파죽지세로 북진하고 있었다. 고려 군사가 지리산 자락 운봉에 진을 치고 몰려오던 왜구를 막아섰다. 고려 장수인 전라경상도 순찰사가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싸움만 붙었다 하면 지레 겁을 먹고 뿔뿔이 흩어지는 고려 군사들이 이번엔 전과 달랐다. 광대뼈가 힘차게 솟아오른 전라경상도 순찰사가 맨 앞에 서서 산이 쩌렁쩌..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82)<마패>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82) 아버지를 일찍 여읜 민국 어머니가 이초시와 재혼하면서 글공부에만 몰두하는데… 민국이 여섯살 때 아버지 박 서방이 이승을 하직했다. 민국은 장날이면 아버지를 따라 장터에 가서 깨엿이며 강정을 사먹던 일이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아부지 등에 업혀 외갓집에 가고, 목마 타고 원두막에도 갔었지.” 민국이는 날마다 아버지 묘소에 가서 흐느꼈다. 동지섣달 추운 날엔 아버지 무덤을 덮어 주겠다며 이불을 들고 나서다가 어미와 부둥켜안고 눈물바다를 이루기도 했다. 민국 어미는 남편이 죽자 평소 하지 않던 농사일에 매달려 근근이 입에 풀칠할 정도로 살았다. 그러다가 어느 해 봄날, 못자리를 내야 할 그 바쁜 철에 몸이 불덩이가 되면서 덜컥 몸져누웠다. 민국이네는 이듬해 보릿고개에 논을 팔았..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81)<명품하인>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81) 볼품없지만 학식 많은 맹초시 감기 걸려 서원 강의 걱정이… 언변 좋은 종 허서방이 나서는데 맹 초시는 참으로 볼품없다. 오척 단신에 눈은 단춧구멍이요, 납작한 콧등엔 살짝곰보 자국까지 찍혔다. 그런 몰골에 비해 머릿속에 들어 있는 학식은 대제학 못지않다. 특히 그 어렵다는 에 관한 한 조선 천지에서 맹 초시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맹 초시는 팔도강산의 서원이나 서당을 찾아다니며 을 강의해주고 몇푼의 돈을 받거나 쌀 됫박을 받아서 노자로 쓰고 또 다른 곳으로 흘러가는 떠돌이 신세가 몸에 배었다. 맹 초시가 가진 것이라고는 당나귀 한 필과 고삐를 잡는 종, 허 서방이 전부다. 그런데 이 종 녀석이 걸물이다. 맹 초시보다 세살 아래이지만 허우대가 멀쑥하고 언변이 좋다. 수완도 ..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80)<삼신할미의 오판>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80) 정월 대보름날 저녁 부녀자들 성화에 못이긴 삼신할미 출산의 고통을 남편들에게 넘기는데… 설날에서 정월 대보름까지, 농사꾼들에게는 팔자가 늘어진 황금 기간이다. 박 서방은 매일 술이다. 정월 열이틀엔 이 서방 집에서 대낮부터 술을 마시다가 고개 너머 이웃 동네 오 서방 집에 가서 또 부어라 마셔라 하다 보니 짧은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런데도 며칠 남지 않은 좋은 날이 아까워 낄낄 웃으며 술타령이 한창이었다. “아부지!” 그때 문밖에서 고함치는 목소리에 박 서방 술잔이 올라가다 딱 멈췄다. 열두살 먹은 박 서방의 맏아들이다. “와?” 방문을 열고 박 서방이 혀 꼬부라진 소리를 뱉었다. “오매가 얼라를 낳았심더.” “아들이가, 딸이가?” “딸입니더.” “그, 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