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130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21) <개마고원 산적>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21) 친정 신행길에 오른 새신부, 가마째 산적에 납치되었는데… 함경도 갑산(甲山) 사또가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길은 요란했다. 말 다섯필 잔등엔 호피, 여우가죽, 수달피, 말린 웅담, 호골, 산삼, 하수오 등등 값비싼 개마고원 특산품들이 바리바리 실리고 금은보화와 묵직한 전대도 실렸다. 칼을 차고 창을 든 포졸 넷이 호위하고 집사와 하인 셋이 따르는 긴 행렬이 화동령 협곡을 지날 때였다. 우르르 쾅쾅, 절벽 위에서 바위가 연달아 떨어지며 화살이 빗발치자 이임 사또 행렬은 혼비백산했다. 이튿날 동헌에서 육방 관속이 나오고 보부상에 호사가들이 발걸음을 멈춰 화동령 협곡은 장터처럼 법석거렸다. 사또 행렬은 구름처럼 흩어져 그림자조차 안 보였다. 오직 사또만이 발가벗긴 채 소나무가지에..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20) <각시탈>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20) 여자보기를 돌같이 하던 신관 사또 고을 열녀에게 효부상을 주었는데… 젊은 신관 사또가 강원도 영월에 부임했다. 그 이름은 공덕수. 나이는 아직 서른에 못 미쳤지만 신언서판(身言書判)에 모자람이 없었다. 게다가 후덕한 인품에 인의(仁義)를 중히 여겨 한점 부끄럼도 없었다. 공 사또는 처자식을 한양에 두고 홀로 내려와 동헌에서 홀아비 생활을 했다. 이를 알고 육방관속이 진수성찬을 차려 질펀하게 연회를 베풀자 공 사또는 휘어진 상다리를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리더니 갖은 아양을 떠는 수청 기생의 손목 한번 안 잡고 연회를 파했다. 이후 모든 관리들은 그달 녹봉에서 연회비를 공제한 걸 알고선 아연실색했다. 정월 대보름이 코앞에 닥친 어느 날, 공 사또가 이방을 불렀다. “대보름날 ..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19) <갓장수와 방물장수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19) 노름판에 끼어든 조생원… 마누라 잡히고 서서방 전대까지… 죽었다던 조생원이 집에 오니… 갓장수 조 생원과 방물장수 서 서방은 항상 붙어다닌다. 처음 발을 들여놓은 마을이라도 고갯마루에서 쓱 내려다보면 어느 어느 집을 찾아가야 할지 한눈에 알아챈다. 기와집이 첫걸음 할 집이요 초가집이라도 넓직한 집이 그 다음이다. 서 서방과 조 생원은 점찍어 둔 집의 대문을 함께 들어선다. 하지만 갓에 탕건·망건·정자관을 짊어진 조 생원은 바깥 사랑채로 가고, 색실·노리개·조개단추·은반지·박가분 등을 가득 채운 방물 고리짝을 맨 서 서방은 안채로 가서 안방마님이나 딸들을 만난다. 둘은 장사수완도 뛰어나 보름 남짓 이 동네 저 마을을 돌아다니다 집으로 돌아갈 땐 전대가 묵직하다. 세살 위 조..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18) <원숭이띠>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18) 제일 똑똑하다고 큰소리 친 ‘오수’ 재주만 믿다 나무서 떨어진 원숭이처럼 손대는 일마다 쫄딱 망하는데… 오수는 민첩하다. 어릴 때부터 달리기를 해도, 헤엄을 쳐도 또래 친구들이 그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머리까지 팽팽 잘 돌아 영악스럽기 짝이 없다. 한가지 흠이라면 ‘자만’이다. 세상에서 자기보다 똑똑한 사람이 없기에 항상 자기 주장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고, 남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는다. 어느 날 밤, 친구들이 모여 수박서리를 가기로 했는데 오수가 나서 임 첨지네 집에 닭서리를 가자고 방향을 틀었다. 임 첨지는 며칠 전에 족제비한테 닭을 몇마리 잃은 터라 잔뜩 긴장해 있었다. 게다가 성질이 고약해 들키면 큰 낭패를 볼 것이라고 모두가 반대했다. 하지만 오수는 막..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17)<도둑을 잡다>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17) 젊은 나이에 과부된 민진사댁 마님 잡혀온 도둑의 포승줄을 풀어 주고 술상까지 차리는데… 엊저녁에 온 눈이 발목까지 빠지는 이른 아침, 허리가 구부정한 늙은이가 어기적어기적 동헌 안마당에 들어서 사또를 직접 만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이방 아래 졸개가 눈살을 찌푸리며 용건이 뭐냐고 묻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민 진사댁 행랑아범이라는 걸 알게 된 졸개가 이방한테 아뢰었다. 그러자 깜짝 놀란 이방이 아직도 수청 기생을 껴안고 있는 사또에게 달려갔다. 사또가 후다닥 일어나 동헌 안뜰로 내려가 민 진사댁 늙은 행랑아범의 두손을 잡았다. “간밤 삼경녘에 도둑이 들어 마님께서 하도 놀라 청심환을 드시고도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허~ 이럴 수가.” 사또가 이방·형방과 포..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16)<박 서방, 황 첨지 그리고 사또>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16) 몸이 부서져라 일하는 박서방, 쟁기날 사려고 대장간으로… 돈통끼고 앉아 평상에서 약주마시는 팔자 좋은 황첨지가 부럽기만 한데… 보리 한골을 베고 난 박 서방은 허리가 두동강이 난듯 선뜻 일어설 수가 없다. 밭둑의 함지박에서 호리병을 꺼내 막걸리 한사발을 단숨에 들이켜자 비 오듯 흘러내리는 땀이 사발에 떨어져 막걸리 반, 땀 반이다. 보리밭 한마지기를 베어 단으로 묶어 산비탈에 널어놓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별이 총총하다. 납덩어리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박 서방은 새벽같이 일어나 소를 끌고 쟁기를 매고 또다시 들로 나가야 한다. 이랴~, 보리밭을 갈아엎고 물꼬를 터 하루빨리 모를 심어야 한다. 모내기를 하고 나면 박 서방의 몸은 녹초가 되지만 또다시 새벽같이 일어..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15) <왼손 가운데손가락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15) 스무살 갓 넘어 과부 된 순심이 깊은밤 쫓기는 한남자를 숨겨주고는 결국 혼례까지 치렀는데… 여자 팔자는 엿가락 구멍치기라고 했던가. 알 수 없는 게 여자의 앞날이다. 혼기가 차오른 순심이는 피어나는 꽃봉오리처럼 화사했다. 반듯한 이목구비에 젖가슴은 부풀어 오르고 잘록한 허리에 엉덩이 두쪽은 빵빵해 뭇남정네들이 침을 삼켰다. 어디 자색(姿色·여자의 고운 얼굴이나 모습)뿐이랴. 양반 가문에다 몇백석을 거둬들이는 부잣집 셋째딸이다. 그래서 모두 순심이 팔자는 끝없이 펼쳐진 비단길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웬걸, 고르고 골라 시집을 갔건만 떵떵거리는 시댁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신랑이 과거만 보면 낙방하더니 책이란 책은 모두 아궁이에 불살라 버리고 허구한 날 술독에 빠져 살았다. 첫날..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114)일곱째 날, 첫 여인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114)일곱째 날, 첫 여인 큰뜻을 품고 과거 보러 가려는 선비… 먼길에 목숨잃을까 걱정돼 도인 찾아 죽음을 피하는 방도 듣고 떠나는데… 젊은 선비가 과거를 보러 먼 길을 나서려니 걱정이 앞섰다. 산골짝에는 산적들이 들끓고 저잣거리엔 왈패들이 활개를 치는 어수선한 세상에 천리길을 떠나려니 절로 한숨만 나왔다. 선비는 을 서른여섯번이나 읽었다는 명리학자를 찾아갔다. 흰 수염을 쓰다듬던 노인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떠나지 말게. 장한 뜻을 품고 떠나는 길에 죽을 운이 기다리고 있어.” 선비가 애원했다. “꼭 가야 합니다. 죽을 운을 피할 수 있는 방도를 알려주십시오.” 도인은 육갑을 짚어보고 오래도록 뜸을 들이더니 대답했다. “살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긴 하지만 실행하기는 대단..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113)곰보 며느리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113)곰보 며느리 천석꾼 부자 이 초시의 아들 덕진… 아버지처럼 과거만 보면 낙방 술마시고 들어온 적막한 밤, 침모 방으로 들어가… 두달쯤 지나 침모 몸에 열이 펄펄… 보름만에 일어나 거울 봤더니… 천석꾼 부자 이 초시는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덕이 넘치는 선비다. 하지만 젊을 때 여덟번이나 과거에 낙방해 청춘이 인고의 세월이었던 것이 한으로 맺혀 있다. 아들 덕진이가 아버지의 한을 풀겠다고 공부에 매달렸다. 이 초시는 아들도 자신처럼 될까 봐 우려했지만 말리지 않았다. 덕진이는 초시에 어렵지 않게 합격했다. 그러나 이게 또 마지막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아버지 이 초시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 과거만 보면 낙방이다. 덕진이는 일곱번 낙방한 뒤로 주막집에 살면서 술로 세월을 보내고..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112)송이버섯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112)송이버섯 청상과부 마님, 머슴 팔푼이 앞세워 송이버섯 따러 음곡산으로… 가파른 골짜기 오르던 팔푼이, ‘쿵’ 떨어져 꼼짝도 못하자 … 총각 머슴 팔푼이가 나무 한지게를 지고 누런 이빨을 드러내 웃으며 대문을 들어섰다. “마, 마, 마님! 이것 좀 보세요. 내 고, 고, 고추하고 꼭 다, 다, 닮았어유.” 삼십대 초반, 청상과부 마님이 눈살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야, 이놈아! 어느 면전이라고 그런 망측한 소리를 지껄이느냐.” 야단을 치고 보니 팔푼이 손바닥에 잡힌 그것은 송이버섯이렷다. “너, 이거 어디서 땄느냐?” “으, 으, 음곡산 고, 고, 골짝에서 땄지유. 헤헤.” 수절하는 양반댁 청상과부는 지난봄 남의 눈도 무섭고 실제로 겁탈 당할세라 좀 모자라는 팔푼이를 머슴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