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51

어느 식당의 메뉴판

어느 식당의 메뉴판 어느 남자가 점심을 먹으러 시내의 한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주인 할머니께서 메뉴판을 보여주기에 읽어보았더니 딱 세 가지 뿐이었습니다. •남탕 8,000원 •여탕 8,000원 •혼탕 10,000원 손님이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남탕은 무엇이고, 여탕은 무엇인가요?” 할머니가 대답하였습니다. “그걸 몰라서 물어? 남탕은 알탕, 여탕은 조개탕이지.” 음식 메뉴가 너무 재밌어서 다시 할머니께 물었습니다. “그럼 혼탕은요?” 할머니가 웃으며 대답하였습니다. “그것은 고추 넣은 조개탕!” 손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주문을 하였습니다. “그럼, 매콤하게 혼탕으로 주시고 국물을 넉넉히 넣어 주세요.” 할머니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잉~ 걱정 말아부러, 고추 들어가면 조개가 벌어져서 국물은 ..

야설 2021.09.25

야화=선비와 산중의미녀

야화=선비와 산중의미녀 옛날에 시골 마을에 어떤 선비 하나가 살고 있었다. 글을 많이 읽어 삼강오륜 인의예지를 다 익혔으되, 살기가 무척 어려웠다. 벼슬을 못하여 녹을 받지 못하는데다, 배운 게 글 읽는 일뿐이라. 농사든 장사든 아무것도 못하니 살림이 기울 수밖에 없었다. 물려받은 재산이 다 떨어지니 얻어먹지 않으면 굶어죽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때 함께 글을 배운 친구 하나가 과거에 급제해서 한양에서 벼슬 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언젠가 말하기를, "살기 어렵거든 우리 집에 와서 쌀이라도 갖다 먹고 해라." 했던 참이었다. 이 선비가 먹고살 방도가 없으니 그 말만 믿고서 한양으로 친구를 찾아가는 판이다. 한양까지 짚신을 신고 걸어서 가려니 몇날 며칠이 걸릴지 모를 일이었다. 쉬지 않고 간다고 ..

야설 2021.09.25

가슴시린 애듯한 사랑 이야기

가슴시린 애듯한 사랑 이야기 조선판, 사랑과영혼 ! 450년 전의 편지 1998년 4월 어느날 경상북도 안동시 정상동 기슭에서는 택지개발을 위해서 연고가 없는 무덤 한기의 이장작업이 있었다. 드러난 목관은 최근에 만들어진 것처럼 전혀 썩지않고 나뭇결도 선명하니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관속에서 조선중기의 유물들이 대량으로 나오면서 발굴작업은 밤중까지 진행되었으며 그중에 하일라이트는 한편의 편짓글이 발견되었다. 무덤속엔 애뜻한 편지가! 무덤의 주인공은 어린 아들과 임신중인 아내를 남기고 죽은 남편의 이름은 고성이씨 가문의 31세의 키 180Cm이상인 장골의 이응태라는 것이 밝혀졌다 망자의 형은 이몽태이며 이응태에게 한장의 편지를 무덤에 남겼으며 현감벼슬을 지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응태의 부친도 망자와 생전에..

야설 2021.09.25

야화(野話) 금시발복(今時 發福)

야화(野話) 금시발복(今時 發福) 10여년 끌어 온 노모의 병을 고치려고 집까지 날린 금복이는 서호댁 머슴이 되어 그 집 문간방에 노모를 업고 들어갔다. 선불로 받은 새경으로 거동 못 하는 노모를 봉양하면서도 머슴 일에 소홀함이 없이 밤 늦도록 일했다. 집주인 서호댁은 손이 귀한 집안에 시집와 1년도 못돼 청상과부가 되어 혼자서 살림살이를 꾸려 가고 있었다. 금복이가 노모까지 밥을 축내니 "새경을 적게 받겠다"고 했지만 서호댁은 오히려 새경을 후하게 쳐줘 금복이를 가슴 뭉클하게 했다. 어느날 밤 금복이 노모는 숨을 거뒀다. 서호댁의 배려로 뒤뜰에 차양을 치고 빈소를 지키고 있는데 웬 낯선 사람 하나가 들어와 문상을 하고 국밥에 술까지 벌컥벌컥 들이켰다. 금복이 다가가 “돌아가신 저의 노모와 어떻게 되시는..

야설 2021.09.25

퇴계 선생과 기생 두향의 사랑 이야기 전설

퇴계 선생과 기생 두향의 사랑 이야기 전설 이황(李滉) 퇴계(退溪)선생은 매화(梅花)를 끔직히도 사랑했다. 그래서 매화를 노래한 시가 1백수가 넘는다. 이렇게 놀랄만큼 큰 집념으로 매화를 사랑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단양군수 시절에 만났던 관기(官妓) 두향(杜香) 때문이었다. 퇴계선생이 단양군수로 부임한것은 48세 때였다. 그리고 두향의 나이는 18세였다. 두향은 첫눈에 퇴계 선생에게 반했지만 처신이 풀 먹인 안동포처럼 빳빳했던 퇴계. 그러나 당시 부인과 아들을 잇달아 잃었던 퇴계선생은 그 빈 가슴에 한 떨기 설중매(雪中梅) 같았던 두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두향은 시(詩)와 서(書)와 가야금에 능했고 특히 매화를 좋아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깊은 사랑은 겨우 9개월 만에 끝나게 되었다. ..

야설 2021.09.25

조선 왕조의 야담과 실화-폐비 윤씨와 장희빈

조선 왕조의 야담과 실화-폐비 윤씨와 장희빈 조선왕조 500여년 동안에 일어난 사건 중에 혼동되기 쉬운 사건이 몇 개 있다. 특히 왕비와 후궁의 암투, 시어머니의 모함, 왕자의 난 등이 그렇다. 예를 들면, 육씨와 박씨가 싸운 육박전이 아니라 왕과 왕비가 싸운 육박전으로 1479년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 페비가 된 윤씨는 성종의 왕비였고, 인수대비의 모함으로 1482년 사약을 마셨다. 윤씨의 아들 연산군이 어머니 윤비의 원수를 갚았다. 장희빈은 숙종 때 인현왕후를 저주하다 걸려서 1701년 사약을 마셨으니까 219년 뒤. 병약했던 장희빈 아들 경종(1688~1724)은 1720년에 왕에 올라 4년간 재위했으나 어머니 장희빈의 복수를 하지 않았다. 선조 때 임해군, 광해군, 영창대군의 왕위 싸움은 광해..

야설 2021.09.25

고금소총 제171 ~180화

고금소총 제171 ~180화 제171화 평양기생 모란 평양기목단 (平壤妓牧丹) 평양 기생 모란은 재주와 미모가 출중하였다. 장사꾼으로 이씨(李氏) 성을 가진 사람이 평양에 당도하여 여각(旅閣)에 묵는 데 마침 모란의 집과 가까운 곳이었다. 모란이 그의 행장과 장사할 재물의 규모를 보고는 그것을 낚아채고자 하여 여염 여인으로 꾸미고 이씨의 숙소를 우연히 지나는 척 하다 거짓으로 놀라는 체 하며 말하였다. "귀하신 어른께서 오신 것을 몰라 뵈었습니다. 저의 집은 바로 이웃입니다." 그리고는 즉시 돌아가니 이씨는 적이 아름다운 미모의 그녀를 사모하게 되었다. 하루 저녁은 이씨가 홀로 앉아 있는 것을 엿본 모란이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와서 권하면서 이씨를 위로하였다. "어른께서 한창 나이에 이곳에서 나그네살이를 ..

야설 2021.09.25

성삼문의 詩文능력

성삼문의 詩文능력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실 때 집현전 학자들을 자주 중국에 보내어 음운을 연구하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명나라 문신들이 조선 집현전학자들의 실력이 상당하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성삼문이 시문에 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그가 음운 연구차 중국에 갔을 때 그의 실력을 테스트할 겸 골려줄 계략을 꾸몄다. 여럿이 모인 문신 중에서 한 사람이 성삼문에게 백로를 두고 시를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성삼문은 첫째 연을 다음과 같이 써 내려갔다. 雪作衣裳玉作肢(설작의상옥작지) 깃털은 백설 같고 다리는 옥과 같은데 窺魚蘆渚幾多時(규어노저기다시) 갈대 늪 물고기를 얼마나 엿보았던고. 여기까지 써 내려가자 그 문신은 족자 하나를 펴 보이면서 이 그림의 화제(畵題)를 지금 쓰고 있는 첫째..

야설 2021.09.25

어명과 임기응변

어명과 임기응변 경복궁 경내(境內)에 경회루가 있고 이 경회루는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다. 조선시대에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면 임금과 대신(大臣)들이 이 루에서 연회를 베풀고는 하였다. 오래 전에 들은 것인지라 어느 임금과 어느 대신과의 이야기인지는 잊어버렸으나 다음과 같은 실화(實話)가 있다. 하루는 임금이 대신들과 경회루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취기(醉氣)가 거나하게 오르자 임금의 장난기가 발동하였다. 임금 “경들은 짐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 있겠소?” 대신 “물론이지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임금 “어떤 방식으로 충성을 맹세할 수 있겠소?” 대신 “전하께서 죽으라는 어명을 내리신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라도 죽겠습니다.” 임금은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 말이 진실이렸다? 만약 경이 짐을 기망(欺罔..

야설 2021.09.25

고금소총161-170화

고금소총161-170화 제161화 어떠한 벼슬을 주랴?(何官除授) 시골에 살던 어떤 상번군사(上番軍士, 지방군인이 서울 근무명령을 받고 올라감))가종묘 문지기로 배정이 되었다. 그 때에 군사의 상관인 수문부장과 종묘령(宗廟令)등은 일 없이 한가로이 늘 베개를 높게 베고 잠을 자거나 술과 밥 내기 노름이나 할 따름이었으므로, 군사는 늘 마음 속으로 부러워하였다. 군사는 지방에서 올라와 여비가 부족하여 여각이나 주막이 아닌 여염집을 밥집으로 정해두고 왕래하며 밥을 먹었는 데, 주인집은 과부가 살았고 주인은 안채에 있으면서 여종을 시켜 밥을 지어내어다 중문 바깥의 툇마루에 갖다 바치도록 하였다. 하루는 군사가 밥집으로 가 중문 밖에서 밥을 달라고 외쳤는데 마침 여종이 심부름을 나가고 없어 아무 대답이 없자 곧..

야설 2021.09.25